[천자 칼럼] 어느 기업의 '마음 방역' 백일장

입력 2020-10-20 17:58
수정 2020-10-21 00:34
백일장(白日場)은 600여 년 전 조선 태종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즉석에서 시를 짓게 한 데서 기원했다. 명칭에 대해서는 달밤에 시를 겨루는 망월장(望月場)과 달리 ‘밝은 날(白日) 재주를 견준다’는 의미와 ‘글 짓던 장소를 뜻한다’ 등 다양한 얘기가 있다. 지금도 전국 백일장에 응모자가 수백 명씩 몰린다.

최근 첨단 배터리 제조기업인 삼성SDI가 ‘마음 방역’을 주제로 사내 백일장을 개최해 화제를 모았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진행한 백일장에는 200명 넘게 응모했다. ‘코로나’를 머리글자로 삼은 삼행시도 포함됐다.

시 최우수작인 장경호 씨의 ‘아들에게 쓰는 편지’에는 집 안에 갇혀 마음껏 뛰놀지 못하는 네 살배기 아들을 향한 애틋한 부정(父情)이 짙게 배어 있다.

‘신나게 뛰어놀던 너의 모습이/바로 어제처럼 눈에 선한데/맑은 공기마저 마음껏 마시지 못하는/지금 너의 모습이 나는 아프다.//해가 뜨면 밖에 나가고 싶은 너의 마스크가 되어줄게./바람 불면 춥지 않게 너의 바람막이가 되어줄게./비오는 날 뛰어놀 수 있게 너의 우비가 되어줄게.//마음껏 놀지 못해 힘들겠지만 널 위해 되어줄게.//나는 너의 아버지니까.’

시 ‘고마운 마스크’로 우수상을 받은 김창남 씨는 ‘처음엔 익숙지 않은 불편함으로/답답했던 너였는데…//너와 함께하는 일상이 어느덧 자연스러움으로 변해버린 지금/애인 부르듯 오늘도 나는 너를 찾는다//너를 쓰고 보니/거친 내 숨소리가 더 크게 들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며 방역의 상징인 마스크를 고마움의 대상으로 의인화했다.

‘코로나’ 삼행시 부문에도 ‘코리아를 찾아온 코로나야/로터리 한 바퀴 휙 돌았으니/나비처럼 훨훨 날아 떠나거라’(최우수작, 김현선), ‘코스모스가 길가에 만발하는/로맨틱한 가을이 왔지만/나는 꾹 참고 내년 가을까지 인내하련다’(우수작, 김민수) 등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노래한 작품이 많았다.

심사위원 나태주 시인은 “경험에서 우러난 삶의 진정성이 잘 스며있다”며 응모자들을 격려했고, 수상자들은 “창의와 상상의 나래로 힘든 시기를 함께 잘 넘자”고 다짐했다.

전기차 배터리 세계 4위 기업인 삼성SDI가 기술과 문화의 접목을 통해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꽃피우는 모습이 보기 좋다. 회사 안팎의 호응이 뜨거워 내년부터 백일장을 정례화할 계획이라니 더욱 기대가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