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편집하는 건 인연을 맺는 일입니다. 편집자는 작가의 첫 독자입니다. 책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까지 작가에 온전히 젖어듭니다. 그렇게 책을 세상에 내놓고, 독자라는 새로운 인연을 열죠.”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44·사진)은 지난달 21일 파주출판도시에서 만나 자신의 첫 책《읽는 직업》(마음산책) 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렇게 말했다. “책 1권이 나오기까지 약 3개월 정도 걸린다”며 “그 과정에서 저자와 저자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면 편집자 역시 그 저자의 책을 제대로 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작가와 책, 독자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인연을 만드는 사람’으로 15년째 살고 있는 베테랑 편집장은 이번엔 편집자로서의 삶과 철학을 내보이는 자신의 책을 들고 세상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 편집장은 인문·사회과학 전문 출판사 글항아리에서 근무하며 굵직한 저서들의 편집을 맡았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되며 4만 부 넘게 팔린《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의학과 교수),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21세기 자본》, 대만 작가 탕누어의《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중국 소설가 옌렌커의《침묵과 한숨》등이다.
그는 “편집자는 저자와 편집자, 독자라는 계(界) 속에서 살아간다”며 “저자는 쓰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하고, 편집자는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새로운 원고를 만나고 싶어하고, 독자는 책 주변을 맴돈다”고 말했다. “한 번이라도 책을 읽어 본 독자들은 나중에라도 책을 계속 읽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게 보자면 책을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으로 딱 구분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책을 읽고 만들고, 또 읽는 사람이고요.”
글항아리의 책은 대부분 두껍다. 이른바 ‘벽돌책’이라 불리는 800~1000여쪽의 책들이다. 이 편집장은 ‘벽돌책 옹호론자’다. “기존의 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성을 쌓기 위해서는 해체와 보존, 재구축에 들어가는 작가의 의지가 책의 두께와 중량감으로 이어진다.”(《읽는 직업》188쪽 중에서)
책 출판시 그의 마지노선은 1000부다. “대부분 출판사에서 책 1권당 최소 2000~3000부는 팔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책을 출판해요. 저는 그에 비하면 기준은 낮죠. 하지만 책 1권이 적어도 1000명의 독자와 만나지 못한다면 출판사로선 정말 힘들거든요. 아무리 좋은 원고라도 1000부를 넘을 자신이 없으면 내지 못해요. 출판되는 책보다 그렇게 묻히는 책이 더 많아요. 편집자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 편집장은 새로운 원고를 찾을 때 저자의 지명도는 전혀 따지지 않는다. 원고의 질과 편집자의 취향,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의 균형 등을 고려한다. 저자가 자기 경력의 권위를 내세우며 원고를 출판하라고 요구할 경우 단칼에 거절한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부드러운 사람에겐 부드럽고, 강한 사람에겐 강하게 나갑니다. 비록 사회에서 크게 알아주는 직업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지도 못하지만 저자와 책, 독자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진 않습니다. 위선을 떨 필요도 없죠.”
독자 입장에서 원고를 바라보는 일도 필수다. “투고 메일함에 새 원고가 들어오면 앞 부분을 A4용지 30장으로 우선 뽑아요. 만약 한 호흡으로 쭉 읽히면 원고 전체를 다 읽고 나서 출판 여부를 선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내용이 좋다 해도 포기해요. 편집자 입장에서 초반부터 원고에 집중하기 어렵다면 독자들에게 다가갈 책이 되긴 힘들 테니까요.”
최근 이 편집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는 불평등과 노년, 죽음 등이다. 그는 “원고를 찾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관심있는 주제에 손이 먼저 가는 게 사실”이라며 “내 경험을 좀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편집자로 살겠느냐”고 물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다른 편집자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젠 조금 알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전 계속 뭔가를 읽고 또 읽을 겁니다. 제가 편집자라 행복합니다. 제 인생의 현실과 이상을 모두 이루고 있으니까요.”
파주=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