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 안 믿는 정부 [전형진의 복덕방통신]

입력 2020-10-14 14:18
수정 2020-10-14 14:24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줄까지 선다고 합니다. 최근 전셋집을 잃게 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사진을 대기 행렬에 합성한 사진까지 인터넷 유머로 떠돌고 있죠.

전셋값 상승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늘 아침 열린 부동산관계장관회의에선 이 같은 현상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또 상승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겠다는 발언이 나왔습니다. 뭘 더 분석하겠다는 걸까요. 해설서까지 펴내야 할 정도로 서둘러 법을 뜯어고칠 땐 이렇게 될 줄 몰라서 이제 와 분석하겠다는 걸까요?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을 처음 취재해본 건 3년 전입니다. 당시엔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그쳤기 때문에 지금처럼 제도의 윤곽이 뚜렷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미 현재를 관통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전세가격이 무시무시하게 상승할 것이란 전문가들의 우려입니다. 결국 예상이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더 무서운 건 내년입니다. 민간 조사업체인 부동산114의 집계에서 내년 서울 아파트 입주물량은 반토막이 납니다. 지난해와 올해는 각 4만5000가구 이상 입주했는데 내년 집들이를 하는 아파트는 2만5000가구에 불과합니다. 공급량 급감에 따른 자연스런 전셋값 상승에다 정책 영향까지 더해질 게 뻔하죠. 집주인들이 이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세입자를 내보내려 궁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문제들에 대한 경고는 언론과 전문가들이 하루이틀 쏟아냈던 게 아닙니다. 아까 3년 전부터 우려가 나왔다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정부는 이런 지적을 언론의 트집 잡기나 정권 흔들기 정도로 치부하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불난 전셋값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다시 분석해야 하는 이유지만요. 사실 지난 몇 년 동안의 모든 정책이 판박이입니다. 공급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다 목이 쉴 때가 돼서야 3기 신도시와 공공참여형 재건축이 나왔죠.

물론 전셋가격의 고공행진이 이어지는 건 정책 과도기적 측면도 있습니다.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청구권은 궁극적으로 주거안정에 초점이 맞춰진 제도입니다. 도입과 동시에 혼란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죠.

다만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개정 ‘주택임대차보호법’의 의원 발의부터 상임위원회 심사, 국회 통과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아시나요? 이 과정을 모두 더하면 2개월인데 사실 국회가 파행하는 동안 법안이 계류된 시간도 포함돼 있습니다.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진 이후 본회의 표결을 통과하기까지는 겨우 사흘이 걸렸습니다. 이후 국무회의도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바로 법안 공포도 이뤄졌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이례적으로 ‘공포 후 즉시 시행’이란 단서가 달렸죠. 임대차 관련 법안을 집값 잡는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서두르다 보니 요즘 같은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현장의 혼란은 극심합니다. 집주인과 세입자 양쪽을 상대해야 하는 공인중개사들은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계약갱신을 거절할 수 있는 사유는 9가지인데 간결한 법 조문에 비해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죠. 가뜩이나 부동산 세법이 복잡해져서 고객에게 적용될 세액도 아닌 세율을 구해주는 것마저 힘든데 일이 하나 더 늘었죠.

반대로 변호사들은 신이 났습니다. 관련 판례가 쌓일 2~3년 뒤부턴 관련 소송이 본격화할 게 뻔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3년 전엔 세무사들도 그랬습니다. 지금은 한숨을 쉬지만요.

전형진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