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굵은 주름이 깊게 파인 고릴라가 정면을 응시한다. 가로와 세로 150㎝ 크기로 확대된 고릴라의 얼굴에선 코와 눈 아래 잔주름, 털 한 올 한 올이 실물처럼 생생하다. 두 눈에는 핑크빛 하트가 안경처럼 걸쳐져 있다. 사진에 디지털 드로잉을 더한 고상우(42)의 신작 ‘샹그릴라’(사진)다. 사랑만 있다면 우락부락한 얼굴과 관계없이 이상향이 될 수 있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 나우에서 고상우 개인전 ‘EVOLUTION(진화)’이 열리고 있다. ‘샹그릴라’를 비롯해 사슴, 코알라, 코끼리 등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들의 초상화와 작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자화상 시리즈 등 10점을 걸었다.
동물의 사진에 색채와 이미지를 더한 뒤 네거티브 방식으로 인화한 동물들의 초상화는 이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일깨운다. 꽃과 나비, 새, 나뭇잎, 꽃잎 등으로 머리와 뿔을 장식한 푸른 빛의 사슴(블랙펄), 이마를 맞댄 채 서로의 코를 휘감고 있는 코끼리(키스Ⅲ), 약간 졸린 듯한 눈으로 앞을 쳐다보는 반달가슴곰(겨울잠), 빛에 반사된 털이 흰색으로 빛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코알라(방화)…. 코알라 작품에 이런 제목을 단 것은 지난 1월 호주에 큰 산불이 나서 코알라가 멸종위기 동물이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물들의 눈에 공통적으로 그려진 핑크빛 하트는 마음, 심장, 사랑, 희생, 생명을 상징한다. 이들도 인간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작가는 특히 동물의 눈동자에 많은 공을 들였다. 눈은 우주와 자연, 동물과 인간,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 흑진주처럼 검은 사슴의 눈은 “왜 우리와 함께 살지 않으려고 해?”라고 묻는 것 같다. 작가가 “생명의 반짝임, 희망으로 가득 찬 눈”이라고 한 이유다.
사진과 회화, 디지털 드로잉,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고상우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작가다. 지난달 25일 영국 필립스옥션에 출품된 동물초상 ‘피에로 사자(Pierrot Lion)’는 시작가(6000파운드)의 약 2.7배인 2만1250파운드(약 3200만원)에 낙찰됐다. 전시는 다음달 4일까지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