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한화시스템 사장의 집무실 책상에는 ‘비밀노트’가 놓여 있다. 김 사장이 1986년 (주)한화 기계부문의 전신인 한국종합기계에 입사한 뒤 35년간 ‘한화맨’으로서 배우고 느낀 점을 자필로 기록한 것이다. 지금도 경영상 어려움이 닥치면 노트를 꺼내 읽어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끊임없이 보완하고 수정된 노트의 내용은 한화시스템 임직원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일부 내용을 복사해 매년 신입사원들에게 나눠준다. 김 사장은 한화의 경쟁력이 선후배 간 끈끈한 정과 교육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는 “한화의 기업문화가 없었다면 이 자리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라며 “선배들의 열정과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이어주는 것도 사장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손에 기름 묻혀가며 기계 공부‘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 노트 중 ‘30가지의 필수적인 회사생활 지침(성공의 지름길)’ 첫 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 사장은 “거래처나 상사를 만났을 때 처음 맡은 일을 한 번에 확실하게 만족시켜야 한다”며 “그다음은 일사천리”라고 말했다. ‘훗날 도움을 받고 싶다면 이해관계가 없을 때 또는 내가 유리할 때 베풀어야 한다’는 지침도 있다. “그래야 상대방을 확실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일을 혼자 다하는 사람은 일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내용도 눈길을 끈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자신의 힘은 20%만 쓰고 80%는 남의 힘을 써야 한다는 의미다. 김 사장은 “함께 일하려면 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고, 미리 협조를 구하는 법도 체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입사 후 상사에게 처음 받은 지시는 기계 전면 보수였다. 당시 대졸 엔지니어의 역할은 도면을 그리는 것이지 직접 기계를 만지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사는 “엔지니어는 손에 기름을 묻히고 조립을 직접 해볼 줄 알아야 한다”며 “1억원까지는 까먹어도 되니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지시했다.
김 사장은 지금까지도 이 상사와 그의 첫 지시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기계를 직접 조립해보고 나니 어떤 기계든 한눈에 작동 원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사람의 성장을 돕는 회사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인생의 전환점은 입사 2년 만에 찾아왔다. 회사에서 일본 수출 담당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1년간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기계 시운전 책임 엔지니어 겸 통역담당으로 3주간 일본에 다녀오면서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기술 격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김 사장은 “선진 기술을 직접 보고 매뉴얼을 모두 다시 만들었다”며 “3주간의 경험이 엔지니어로서 평생 큰 자산이 됐다”고 회상했다.
김 사장의 다음 행선지는 미국이었다. 1990년 당시 회사는 F-16 전투기 사업 참여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는 “영어부터 배우고 싶다고 하니 선배들이 흔쾌히 교육 기회를 만들어줬다”며 “직원들의 교육에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것이 한화의 기업문화”라고 말했다. 30가지 지침에는 ‘영어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절도 있다. 현지에서 몸으로 부딪쳐가며 일한 끝에 그는 ‘미국통’이 됐다. 에어택시·위성안테나가 신성장동력김 사장은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난다. 오전 6시까지 운동한 뒤 한 시간 동안 신문을 정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모든 면을 꼼꼼히 읽는다. 하루라도 신문을 정독하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부터 들인 습관이다. 당시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한화유니버셜베어링스 법인장을 맡고 있었다. 김 사장은 “경제 사회의 흐름을 빠르게 읽고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워 경영에 반영하는 ‘시나리오 경영’으로 당시 위기를 이겨냈다”고 회고했다.
김 사장은 한화테크엠, 한화기계부문, 한화정밀기계의 대표를 모두 거친 뒤 작년 9월 한화시스템 사장에 올랐다. 그는 새로운 회사의 수장을 맡을 때마다 세 가지 원칙을 세워 즉시 실행에 옮겼다. 우선 외부 컨설팅을 없앴다. 직원들만큼 회사를 잘 아는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다. 김 사장은 “설문조사와 직접 미팅을 통해 회사의 강점과 문제점을 파악한 뒤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주인의식을 심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한화시스템 사장이 된 뒤에도 ‘주인의식’을 가장 강조했다. 감시정찰과 지휘통제통신 분야 국내 1위 업체인 한화시스템은 삼성과 프랑스 탈레스가 합작해 세운 삼성탈레스가 전신이다. 2018년 정보통신기술(ICT)을 담당하던 한화S&C와 합병한 뒤 한화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떠올랐다. 김 사장은 “삼성 시절의 인사시스템, 성과급 등은 최대한 손대지 않고 그대로 뒀다”며 “다만 방산회사들의 체질로 여겨졌던 소극적인 자세는 바꾸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과거처럼 방위사업청 계획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김 사장은 “예전에는 국방백서를 기반으로 사업계획을 짰다면 지금은 미국의 방위사업계획, 무인기 사업계획 등을 보고 중장기 계획을 세운다”고 설명했다.
의사 결정 시간도 크게 단축시켰다. “대표이사 결제 승인까지 8시간을 넘기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강조했다. 불필요한 문서 보고와 회의를 최대한 줄였다. 그는 요즘 중장기 신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고민해 선제적인 투자를 하기 위해서다. 김 사장은 “사업성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투자하면 늦다”며 “현재 사업은 임원들에게 과감히 위임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에 집중하는 것이 사장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한화시스템의 중장기 사업계획에는 위성통신 안테나와 에어택시(PAV)가 포함돼 있다. 위성통신 안테나 사업은 지난 6월 영국 위성통신 안테나 기술 벤처기업 페이저솔루션을 인수하면서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김 사장은 “항공기 안에서 동영상 이용 등 고품질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자율주행차 기술과도 접목할 수 있어 성장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에어택시 사업 개발을 위해 미국 오버에어와도 손잡았다. 그는 “두 분야에서 세계 1위가 되는 게 한화시스템의 목표”라고 밝혔다.
■ 김연철 한화시스템 사장
△1961년 서울 출생
△1979년 서울 여의도고 졸업
△1986년 연세대 기계공학과 졸업
△1986년 한국종합기계 (한화 기계부문의 전신) 입사
△2005년 (주)한화 항공우주사업팀 천안공장장
△2007년 (주)한화 무역부문 UBI법인장
△2015년 (주)한화 기계부문 대표
△2016년 한화정밀기계 대표
△2017년 한화테크윈 대표
△2019년 한화시스템 사장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