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효성티앤씨 경북 구미 공장. 입구로 들어서니 기계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온도가 높을 땐 실내 온도가 45도까지 오른다. 기계에선 쉴새 없이 샤워기 물줄기 같은 가는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폴리에스테르 리사이클 칩을 녹여 가늘게 만든 것이었다. 찬바람을 만난 물줄기는 금세 실로 바뀌었다. 효성티앤씨의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원사 ‘리젠’이다. 이 실을 끊기지 않게 둘둘 말아 7~9㎏ 무게로 포장하면 공정이 끝난다.
글로벌 패션업체 앞다퉈 구매리젠의 원료는 100% 페트병이다. 다른 재료는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페트병에 붙어 있는 접착제, 잉크 등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만 거친다. 기존 폴리에스테르 원사는 고순도테레프탈산(TPA)과 에틸렌글리콜(EG)로 만든다. 버려진 페트병이 석유화학 공정을 통해 나오는 TPA, EG를 대체한 셈이다.
리젠은 제조는 까다로운 반면 품질은 떨어진다. 실을 뽑아내는 중간에 자주 끊어져 불량률도 높다. 그런데도 효성티앤씨가 리젠을 생산하는 것은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박용준 스마트섬유팀장은 “리젠 원사를 기존 폴리에스테르 원사 대비 약 1.5배 높은 가격에 판다”고 했다.
리젠이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어서다. 소비자들이 친환경 소재로 만든 옷, 가방, 액세서리에 선뜻 지갑을 열면서 글로벌 패션업체들의 주문이 급격히 늘었다.
스웨덴 제조·직매형 의류(SPA) 브랜드 H&M이 공격적이다. 이 회사는 앞으로 10년 이내에 페트병을 재활용한 폴리에스테르, 산업 폐기물로 만든 나일론 등 재활용 소재만 쓰겠다고 발표했다. H&M은 친환경 소재로 만든 제품임을 라벨에 별도 표기하고 있다. H&M의 친환경 움직임에 자극을 받은 자라, 유니클로 등도 친환경 소재 제품 개발에 나섰다. 독일 스포츠 브랜드 아디다스도 올해 생산하는 제품 절반을 재활용 소재, 혹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소재를 쓰기로 했다. 미국 패션 브랜드 에버레인 역시 내년까지 100% 재활용 섬유만 쓰겠다고 공언했다.
글로벌 패션 업체들은 한국산 리사이클 원사를 선호한다. 중국 제품에 비해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신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날 효성 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네덜란드 친환경 인증 전문기관 컨트롤 유니언이 현장 실사를 하고 있었다. 효성티앤씨의 리젠은 GRS(global recycle standard·국제친환경인증)를 받았다. 박 팀장은 “폴리에스테르, 나일론 같은 원사는 중국 기업들이 워낙 저렴하게 생산해 세계 시장에서 싸우는 것이 쉽지 않지만 친환경 소재로 승부를 하면 해볼 만하다”고 했다. 리젠 매출 비중 빠르게 상승효성티앤씨는 리젠을 2000년대 중반부터 생산했다. 중국 저가 제품과 차별화하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빛을 보기까지 10년 넘게 걸렸다. 효성티앤씨 폴리에스테르 원사 매출에서 리사이클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7년까지 채 1%가 되지 않았다. 이 비중은 올 상반기 기준 3.1%까지 올랐다.
‘러브콜’은 여러 곳에서 오고 있다. 국내 지방자치단체들은 효성티앤씨에 원료인 페트병 공급을 추진 중이다. 제주도가 가장 먼저 나섰다. 지난 4월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투명하고 세척이 잘된 페트병만 골라 공급하고 있다. 일본 대만 등에서 수입해 썼던 것을 일부 대체했다.
국내 패션 업체들도 리젠을 소재로 상품 양산을 추진 중이다. 아웃도어 업체들이 적극적이다. 리젠 원사로 시제품 생산까지 마친 기업도 있다. 이들은 리사이클 폴리에스테르뿐 아니라 리사이클 나일론과 스판덱스 등으로 범위도 확장하고 있다. 스타트업 플리츠마마는 효성티앤씨 리젠 원사만으로 옷, 가방 등을 제작해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소재업계에서는 ‘친환경 히트상품’이 더 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웃돈을 얹어주겠다는 글로벌 패션, 화장품 기업이 수두룩하다는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신뢰성 있는 재활용 소재를 만들기만 하면 이들 기업에 기존 소재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공급할 수 있다”며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가 국내 기업에도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미=안재광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