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호 칼럼] '벼랑끝 기업' 등까지 떠미나

입력 2020-10-12 17:59
수정 2021-04-20 17:24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에 이어 징벌적 손해배상제, 집단소송제 확대 등 반(反)기업 법안들이 이대로 국회를 통과하면 기업들은 만신창이가 될 게 뻔하다. 경영권 방어와 소송에 대비하느라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은커녕 중장기 목표 설정 및 신사업 계획 수립 등에 써야 할 시간도 빼앗기게 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대주주 의결권 3% 제한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징벌적 규제다. 감사(사외이사 겸직) 자리를 적대적 외부 세력에 내주지 않으려면 기업은 많은 우호 지분(세력) 확보에 나서야 한다. 해외 선진국과 달리 차등의결권(황금주) 포이즌필 등 경영권 방어 장치가 도입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기업들이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인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외국인 투자자나 소액주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돼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보다는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가 부양에 매달리는 ‘주주 포퓰리즘’에 빠져들 가능성도 크다.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 의무 비율 확대와 사익편취(일감몰아주기) 규제 강화는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꼬이게 하고 있다.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는 기업이나 자회사·손자회사를 새로 편입할 예정인 기존 지주회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일감몰아주기 규제가 강화되면 경영상 필요로 수직계열화한 계열사 간 거래가 위축될 수 있다. 규제를 피하려면 총수 일가가 보유한 해당 계열사 지분을 처분해 20% 밑으로 낮춰야 한다.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과 집단소송 대상 확대로 ‘기획 소송’이 남발되면 기업은 움츠러들고 기업가 정신은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 기업들이 법률적 리스크를 지지 않기 위해 모험을 꺼리면서 인수합병(M&A)이나 신사업 진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투자나 일자리 창출도 기대하기 어렵다.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온 초(超)경쟁, 영역파괴 시대를 맞은 기업을 낡은 규제 틀로 가두려는 정치권의 행태는 무능하다 못해 한심하다. 금산(금융자본과 산업자본)분리, 출자제한 등의 규제는 기업의 날개를 꺾고 있다. 온라인 유통 1위인 미국 아마존은 이미 제조업 금융 IT(정보기술) 등에 전방위적으로 뛰어들었다.

업종은 물론 대·중소기업, 아군과 적군의 구분까지 무의미해지는 추세다. 일본의 전자회사 소니는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쇼 CES에서 자율주행 전기자동차(비전S)를 선보였다. 현대자동차는 우버와 손잡고 하늘을 나는 택시(플라잉 카)를 개발 중이다. 129년 역사의 제너럴일렉트릭(GE)이 쇠락하는 데는 채 10년도 걸리지 않았다.

애플(애플TV)과 디즈니가 넷플릭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탄생시킨 애플은 하드웨어(아이폰)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콘텐츠)로 먹고사는 전략을 펴고 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삼성전자와 LG화학은 지난 3분기에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 현대차는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주요 업체로는 유일하게 판매량을 늘렸다. 과감한 투자를 통한 초격차 유지, 끊임없는 품질혁신과 연구개발(R&D) 투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성과들이다.

반기업 입법을 중단·유예해 달라는 기업인들의 호소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부와 여당은 듣는 시늉만 한다. 2030 젊은층 표심이 달린 동학개미의 불만(주식 양도세 부과 대상 확대)에는 ‘앗 뜨거워’ 하면서 즉각 반응하는 태도와 대조적이다. 기업이 원하는 노동개혁에는 눈과 귀를 닫은 채 해고자의 노동조합 가입을 허용한 노조법 개정안은 벼락치기 방학숙제 하듯 처리하려는 모습이다. 이렇게 기업을 홀대하고도 경제가 살아나길 바랄 수 있을까.

leek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