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시계 제조강국’으로 통했다. 세계 시장에서 스위스·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해외 명품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 쏟아져 들어오고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국내 시계산업은 10만~50만원대 중저가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위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엔 비슷한 가격대에 다채로운 기능으로 무장한 스마트워치가 시계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국내 업계는 기존 기술인 시계 무브먼트(동력장치)와 스마트워치를 결합하는 융합을 시도하는 등 다방면으로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에 따르면 국내 시계산업은 3조4866억원(2018년 기준) 규모다. 이 중 수입 제품(3조3066억원)이 내수 시장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기업의 시계 생산액은 1800억원으로 5.2% 수준에 그친다.
국내 시계산업은 1980년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대우받으며 호황기를 누렸다. 삼성시계, 오리엔트, 아남 등 국내 대기업이 내수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들 업체는 ‘삼성돌체’, ‘오리엔트 갤럭시’ 등 자체 브랜드를 내세워 국내외 시장을 공략했다. 대기업들은 주로 시계 케이스를 만들고 수백 개 중소 협력사들이 대기업에 용두, 밴드, 핸드 등 부품을 공급하는 생태계가 유지됐다. 삼성시계는 일본 세이코, 스위스 론진 등에 라이선스 방식으로 완제품을 납품하는 등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1990년대 들어 해외 명품 수입이 허용되면서부터 스위스제 고가 제품이 국내 시장에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대기업들부터 하나둘 시계 사업에서 손을 뗐다. 국내 시계산업은 2000년대 중반부터 세계적인 브랜드 인지도를 내세운 해외 업체에 고가 시장을 내주며 중소기업 위주의 생태계로 재편됐다. 김대붕 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 전무는 “조합에 등록된 시계 관련 업체 70곳을 포함해 전체 시계 회사 중 10인 미만 업체 비중이 60%에 달한다”고 설명했다. 중저가 손목시계로 명맥국내 시계 업체들이 국내외에 공급하는 완제품 손목시계는 주로 10만~50만원대 제품이다. 수입 브랜드가 고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국내 업체 대부분은 중저가 시장에 주력하고 있다. 국내 업체로는 로만손, 해리엇, 에코시계 등이 그나마 자체 브랜드를 걸고 국내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완제품은 자체 브랜드나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주로 홍콩, 중동에 수출하고 있다.
국내 시계산업은 스마트워치라는 경쟁 상품의 등장으로 또다시 기로에 놓였다. 다양한 기능을 보유한 스마트워치의 가격대가 10만원 안팎 저가부터 100만원 초반의 고가까지 아우르며 중저가 손목시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어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카운터리서치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세계 스마트워치 판매량은 4200만 대로 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했다.
김영수 에이치엠디씨 대표(한국시계산업협동조합 이사장)는 “국내 시계 업계는 산학연 협력을 통해 기계식 무브먼트와 스마트워치를 결합한 신제품을 개발하는 등 돌파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상반기 수출 ‘반짝’…“단기적 현상”지난해 꺾였던 시계 수출은 올 상반기 반짝 반등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1~8월) 시계 수출은 5221만8000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6.87% 증가했다. 지난 5월 수출은 1151만7000달러. 월별 수출액으로는 2012년 12월(1276만3000달러)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전체 수출의 약 70%를 차지하는 귀금속 손목시계와 일반 손목시계 수출이 각각 32.6%, 26.3% 늘면서 실적 개선을 견인했다. 같은 기간 시계 수입은 5억2200만4000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21.1% 줄었다.
시계 업계에선 세계 시계 시장의 73%를 점유하고 있는 스위스·홍콩 실적이 올 상반기 급감하면서 국내 업체가 일부 반사이익을 누린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스는 코로나19 사태로 시계 제조 공장이 셧다운(폐쇄)되면서 상반기 시계 수출량이 작년 동기 대비 44.9% 감소했다. 홍콩 역시 코로나19와 지난해 발발한 홍콩시위 영향으로 시계·광학기기 수출이 올해(1~7월) 28.2% 줄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추세가 계속되진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30년간 벌어져온 국내와 해외 업체 간 간극을 개선할 재료가 마땅치 않아서다. 김영수 대표는 “국내 시계 업계가 반세기 가까이 쌓아온 기술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민·관·연이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