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1300만원 무조건 지급"…서초구의 '청년 기본소득' 실험

입력 2020-10-05 16:41
수정 2020-10-05 18:47
재산세 인하에 불을 댕긴 서울 서초구가 이번엔 청년 기본소득 실험에 나섰다. 극심한 취업난으로 '희망 사다리'가 끊긴 만 24~29세 청년 300명을 대상으로 2년간 조건없이 1300만원 규모의 기본소득을 나눠주는 방안이다. 막대한 예산과 행정력이 투입될 기본소득에 대해 탁상공론식 논의만 할 게 아니라 실제 정책 효과를 검증해 보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고 국민의힘이 기본소득을 '1호 정강정책'으로 채택한 상황에서 서초구의 이번 실험은 기본소득 논란에 불을 지필 것으로 전망된다. ○ 청년 기본소득 실험 조례 발의 5일 서초구의회 등에 따르면 서초구는 내년 시행을 목표로 청년 기본소득 실험을 위한 조례 개정안을 구의회에 제출했다. 서초구가 추진하는 청년 기본소득 실험은 구내 1년 이상 거주한 만 24~29세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한다.

우선 실험 참여 희망자에 대한 신청을 받아 서류심사와 무작위 추출로 300명을 실험집단으로 선발할 예정이다. 1인당 매월 52만원(2020년 1인 가구 생계급여 기준)을 2년간 지급할 계획이다. 1인당 총 지급액은 1250만원 수준이다. 소득수준이나 취업여부 등 전제 조건은 없다.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복지정책인 기본소득의 취지에 맞추기 위해서다.

나머지 700명은 비교집단으로 정기적인 설문조사에 응할 때마다 일회성 실비를 지급한다. 비교집단 참여자 수는 이탈자 등을 감안해 실험집단보다 두 배 이상 확보키로 했다.

조은희 서초구청장(사진)은 "두 집단간 분석을 통해 청년기본소득이 생활방식, 고용, 삶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종합적으로 검증할 계획"이라며 "기본소득 모니터링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실험기간 변화의 추이를 전세계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초구는 기본소득과는 별개로 청년들의 근로의욕을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시행할 방침이다. 블록체인, 인공지능(AI), 크리에이터 등 수요가 많은 현행 교육프로그램을 확대 개편해 청년들에게 제공할 예정이다.

조 구청장은 "노인은 노령연금, 아동은 아동수당이 있는데 경제적 취약 계층인 청년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며 "기본소득을 시작한다면 청년에게 먼저 적용할 수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지원해야할지 직접 실험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사전 검증없는 선심성 정책 안돼"기본소득에 대한 정책 실험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통 틀어 서초구가 처음이다. 현행 청년에 현금을 지급하는 정책들은 지원규모가 크지 않아 기본소득이라고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효과에 대한 구체적인 검증이 없는 선심성이라는 게 서초구의 판단이다.

특히 조 구청장은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청년기본소득 정책과 관련, 날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조 구청장은 "사전 검증도 없이 매년 천억원이 넘는 혈세를 쓰는 것은 예비타당성조사 없이 지자체장의 '감(感)'으로 대규모 투자사업을 하는 것과 같다"며 "사실상 매표행위"라고 했다.

경기도는 만 24세에게 최대 100만원의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데 올해 1500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지급금액이 세 달에 25만원으로 한 달에 약 8만원이 지급돼 최저 소득을 보장해주자는 ‘기본소득’의 개념과는 출발부터가 다르며 만 24세에게만 지급되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대상자도 너무 좁다는 게 조 구청장의 의견이다. 조 구청장은 "경기연구원에서 청년기본소득에 대해 사후 만족도를 시행했지만 평가기간이 짧고 응답자 수도 적어 보편성을 갖기 어렵다"며 "청년에게 현금지원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는 '이재명식 플라시보 효과'에 취해있다"고 비판했다.

조 구청장은 서울시가 지급하는 청년수당의 경우 전제조건이 많아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기본소득'과는 개념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서울시는 34세 미만 청년에게 300만원의 청년수당을 주는데 연 1000억원을 쓰고 있다. 중위소득 150% 미만에 미취업자라는 조건이 달려있다. ○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탁상공론만해외에선 기본소득과 관련한 정책실험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핀란드의 경우 2017~2018년 실업급여 수급자 2000명을 대상으로 월 560유로(76만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을 했다. 기본소득을 받은 집단의 평균 고용일수가 다소 길고 스트레스, 우울감 등을 덜 느꼈다는 결과가 나왔다.

독일은 내년부터 2024년까지 단계별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1단계로 120명에게 1200유로씩 지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2단계에선 선별적으로 급여가 낮은 사람들에게 1200유로를 더 주고, 3단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1200유로를 주되 그 외 소득에 대해 50%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 같은 단계별 실험을 통해 보편적 복지와 선별적 복지의 효과를 비교하고 세금 납부에 대한 파장까지 분석할 예정이다.

조 구청장은 "서초구가 청년 기본소득 실험에 나선 이유는 기본소득이 전 국민적인 관심으로 떠올랐음에도 논란만 무성할 뿐 정교한 시나리오 하나 없기 때문"이라며 "정부가 저출산 대책, 청년 일자리 대책 등으로 수 조원의 혈세를 퍼부었지만 과학적 검증 없이 포퓰리즘 정책만 펼쳐왔다"고 말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