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태피스트리·판화…박래현 '3중 예술' 속으로

입력 2020-09-29 15:43
수정 2020-09-29 22:41

우향 박래현(1920~1976)은 일제강점기에 일본화를 배웠으나 해방 후에는 한국적이고 현대적인 회화를 모색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감할 수 있는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를 탐구했다. 섬유예술이 싹트기 시작한 1960년대에 우향이 선보인 태피스트리, 다양한 동판화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 판화 작품은 20세기 한국 미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으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박래현이 일반 대중에게 낯선 것은 청각장애를 지닌 천재 화가인 운보 김기창의 부인으로 부각돼서였다. ‘미술가 박래현’의 선구적인 미술 작업과 예술적 성취를 조명하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29일 덕수궁관 전관에서 개막하는 ‘박래현, 삼중통역자’전이다.

박래현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43년 ‘단장’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한 새로운 동양화풍으로 1956년 대한미술협회전과 국전에서 각각 ‘이른 아침’과 ‘노점’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화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추상화의 물결 속에서 김기창과 함께 동양화의 추상을 이끌었고, 1967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방문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하고 미국 뉴욕에 정착한 뒤에는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영역을 확장했다. 7년 만에 돌아와 1974년에 연 귀국판화전으로 국내 미술계를 놀라게 했으나 1976년 1월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해 대중과 만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 ‘삼중통역자’는 박래현이 자신에게 붙인 이름이다. 미국 여행 당시 박래현은 여행가이드의 영어를 해석해 구화와 몸짓으로 김기창에게 설명해줬다. 여행에 동행한 수필가 모윤숙이 그런 모습에 관심을 보이자 박래현은 자신이 “삼중통역자와 같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삼중통역’은 회화, 태피스트리, 판화의 세 매체를 넘나들며 연결했던 그의 예술 세계를 의미한다.

전시는 박래현의 도전을 따라 1부 한국화의 ‘현대’, 2부 여성과 ‘생활’, 3부 세계여행과 ‘추상’, 4부 판화와 ‘기술’로 구성된다. 1985년 10주기 전시 이후 개인들이 소장해온 대표작이 대거 출품됐다.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등 총 138점을 공개한다.

1부에서는 박래현이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를 버리고, 수묵과 담채로 당대의 미의식을 구현한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한다. 조선미전 총독상 수상작 ‘단장’, 대한미협전 대통령상 수상작 ‘이른 아침’, 국전 대통령상 수상작 ‘노점’이 한자리에서 공개된다.

2부에서는 화가 김기창의 부인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로 살았던 박래현이 예술과 생활의 조화를 어떻게 모색했는지 보여준다. 1960~1970년대 여성지에 실린 박래현의 수필들이 전시돼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고민했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3부에서는 세계를 여행하고 이국 문화를 체험한 뒤 완성해 나간 독자적인 추상화의 성격을 탐구한다. 1960년대 세계 여행을 다니며 박물관의 고대 유물들을 그린 스케치북은 그가 독자적인 추상화를 어떻게 완성해 갔는지 짐작하게 한다. 4부에서는 판화와 태피스트리의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동양화의 표현 영역을 확장한 그의 마지막 도전을 조명한다. 박래현이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동양화 다섯 작품이 함께 공개된다. 판화와 동양화를 결합하고자 했던 박래현이 제시한 새로운 동양화를 감상할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오랫동안 박래현의 작품을 비장(秘藏)한 소장가들의 적극적 협력으로 평소 보기 어려웠던 작품이 대거 전시장으로 ‘외출’했다”며 “열악했던 여성 미술계에서 선구자로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박래현 예술의 실체를 조명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덕수궁관 전시는 내년 1월 3일까지, 이후 1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으로 옮겨 전시된다.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