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돈’ 속 작전세력들이 펼치는 주가조작 작전에서는 증권사 직원의 ‘실수’가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 주인공 조일현(류준열 분)이 참여한 첫 작전에서 한영증권의 김 대리(김강현 분)는 실수로 위장해 선물 만기 하루를 앞두고 시장 가격보다 한참 낮은 가격에 대량의 스프레드 매도 물량을 내놓는다. 일현과 세력은 이 물량을 대부분 받아가고 이후 시장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막대한 차익을 누린다. 한영증권은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파산한 것으로 묘사된다. 치명적 주문실수 팻 핑거
일개 대리급 직원의 실수로 회사가 순식간에 파산한다는 내용은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개인투자자는 물론이고 거대 금융회사가 순간의 실수로 엄청난 손실을 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금융업계에서는 이런 주문 실수를 ‘팻 핑거’라고 부른다. 손가락이 두꺼워 컴퓨터 키보드로 주문하는 과정에서 거래량이나 가격 등을 잘못 입력하는 것을 뜻한다.
국내에서 자주 회자되는 팻 핑거 사례로는 2013년 12월 12일 발생한 한맥증권 사태가 있다. 당시 한맥증권의 한 직원은 프로그램 매매 과정에서 코스피200지수선물 옵션 가격의 변수가 되는 이자율을 실수로 잘못 입력했다. 그 결과 단 2분 만에 460억원대의 손실이 발생했고, 30년 역사의 한맥증권은 파산에 이르렀다. ‘유령주식’으로 시장 대혼란 겪기도2018년에는 대형 팻 핑거 사건이 두 차례 발생했다. 2월엔 케이프투자증권 직원이 코스피200 옵션을 이론가 대비 20% 가까이 낮은 가격에 주문했다. 이 실수로 케이프투자증권은 그해 순이익의 절반에 해당하는 62억원을 하루 만에 날렸다.
불과 두 달 뒤인 4월 6일 삼성증권에서는 회사가 우리사주 283만 주에 대해 주당 1000원을 배당하는 대신 1000주를 배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른바 ‘삼성증권 유령주식 사태’다. 삼성증권 정관상 주식 발행 한도를 수십 배 뛰어넘는 28억1295만 주의 ‘유령주식’이 발행됐고 이를 배당받은 직원 중 일부가 시장에 내다 팔면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삼성증권은 팔린 만큼의 주식을 매수 혹은 대차하는 방식으로 다시 전량 확보하는 과정에서 매도금과 매수금 사이의 차액과 수수료 등 94억여원의 손해를 봤다. 삼성증권은 주식을 판 직원 13명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법원은 이들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삼성증권 시스템의 결함과 담당 직원의 실수, 사고 직후 사내방송 등을 통해 매도금지 공지를 하지 않은 점을 들어 직원들의 배상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전산 입력 실수를 저질러 배당금 대신 주식을 입고한 담당 직원 2명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금융당국은 팻 핑거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각종 안전장치를 도입하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삼성증권 유령주식 사태 이후 단일 주문의 주식 수량 한도를 해당 종목 상장주식의 5%에서 1%로 축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종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판단으로 투자 결정이 이뤄지는 금융업의 특성상 이런 황당한 실수가 완전히 없어지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동학개미도 작전 피해자 될 수 있어영화는 주가조작 참여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작전세력을 이끄는 ‘번호표’(유지태 분)의 작전에 휘말린 일현의 친구 우성이의 아버지가 회사를 잃을 위기에 처하지만, 번호표의 뒤를 찌른 일현의 ‘역작전’을 통해 구제된다. 실제로는 어떨까. 현실의 투자자들은 일현과 번호표가 온갖 방식으로 부양한 고가의 주식을 팔아치우고 환호하는 사이, 원래 가격으로 급락한 주식을 보며 절규하고 있을 것이다.
금융당국은 올해 동학개미 열풍으로 주식 세계에 입문한 초보 투자자들이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연일 경고하고 있다. 올 들어 지난 3월까지 개인이 주식시장에서 순매수한 금액만 27조5759억원(유가증권시장 23조3356억원, 코스닥시장 4조2403억원)에 달한다. 연도별 같은 기간 역대 최대 규모다. 개인투자자 시장 점유율 1위 증권사인 키움증권에서는 2월 한달에만 40만 개가 넘는 신규 계좌가 개설됐다. 정보 수준이 낮고, 투자 경험이 없는 개인투자자들이 대거 시장에 합류하면서 금융당국은 이들이 작전세력의 먹잇감이 될 것을 경고한 바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이같은 징후들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개인투자자들이 가장 쉽게 휘말리는 테마주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특수를 맞아 활개치고 있다. 테마주는 기업 실적과 무관한 정보에 따라 주가가 요동치는 종목으로, 추종 매매 시 세력들의 작전에 휘말릴 위험이 크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코로나19 테마주 69개 종목의 지난 2~3월 평균 주가 변동률은 107.1%로, 코스피지수(55.5%)의 두 배에 달했다. 한국거래소 시장감시위원회는 2개 종목에서 불공정거래 혐의를 확인하고 심리 절차에 들어가기도 했다.
전범진 한국경제신문 기자 forward@hankyung.com NIE 포인트① 헛소문 유포 등 온갖 방법으로 주가를 올린 뒤 고가에 주식을 팔아 수익을 챙기는 주식시장 작전세력들은 항상 작전에 성공할까.
② 주가는 기업의 현재 실적뿐 아니라 미래의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이 주식시장에서 작전세력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제공하는 것일까.
③ 소문에 끌려다니지 않고 기업가치를 냉정히 평가하는 등 개인투자자들이 주식시장 작전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