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접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여론 조사에서 크게 뒤졌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월 말 공화당 전당 대회 이후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조 바이든을 무섭게 추격하면서다.
특히 승패를 가를 핵심 경합 주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바이든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4년 전 트럼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후보 때보다 좁혀졌다. 아직은 바이든 후보가 우세하지만 전세가 뒤집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6대 경합 주 판세 ‘초박빙’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인종 차별 시위가 겹치면서 한동안 바이든 후보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바이든 후보는 개별 여론 조사에서 힐러리 전 후보가 단 한 차례도 넘지 못했던 ‘마(魔)의 50% 지지율’을 넘길 때가 많았다. 민주당도 주류(중도)와 비주류(진보)로 분열됐던 4년 전과 달리 올해는 ‘트럼프 타도’ 깃발 아래 바이든 후보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실망한 중도층과 공화당 성향 유권자 상당수도 바이든 후보 쪽으로 기울었다. ‘바이든 대세론’이 나왔던 배경이다.
최근 기류가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 에머슨대가 지난 8월 30~31일 유권자 1567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바이든 후보와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9%와 47%로 2%포인트 차였다. 오차 범위(±2.4%) 내 접전이다. 여론 조사를 이끈 스펜서 킴볼 소장은 공화당 전당 대회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긍정 평가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정치 전문 사이트 ‘리얼 클리어 폴리틱스’의 여론 조사 평균 집계에서도 이런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9월 1일 현재 전국 여론 조사 판세는 바이든 후보 49.6%, 트럼프 대통령 43.4%로 6.2%포인트 차다. 한 달 전(7.4%포인트 차이)보다 격차가 줄었다. 4년 전 힐러리 후보 때(3.9%포인트 차이)보다 유리하지만 바이든 후보로선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특히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플로리다·노스캐롤라이나·애리조나 등 6개 핵심 경합 주 판세는 초박빙이다. 현재 이들 6개 주에서 바이든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을 평균 2.7%포인트 앞선다. 한 달 전(5.6%포인트 차이)보다 격차가 크게 줄었다. 4년 전 힐러리(3.3%포인트) 후보 때보다 차이가 작다.
힐러리 전 후보는 2016년 대선 때 유권자 득표수에선 300만 표 가까이 이겼지만 이들 6개 경합 주에서 전패했다. 그 결과 전체 선거인단 득표수에서 트럼프 후보에게 뒤졌고 결국 백악관을 내줬다. 미국 대선은 주별 승자가 그 주에 걸린 선거인단을 독식하고 선거인단 합계에서 앞선 후보가 최종 승자가 된다. 이 때문에 경합 주 승패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이들 6개 주에 걸린 선거인단은 101명으로 전체 선거인단(538명)의 19%에 달한다.
코로나19 대처 실패는 트럼프 대통령에겐 최대 약점이다. 미국 내 코로나19 사망자는 이미 18만 명을 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월스트리트저널과 NBC가 8월 9~12일 유권자 9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누가 코로나19에 잘 대처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바이든 후보를 꼽은 유권자는 49%, 트럼프 대통령을 꼽은 유권자는 33%였다. 인종 차별 대처의 적임자를 묻는 질문에서도 바이든(53%) 후보가 트럼프(29%) 대통령을 압도했다.
하지만 ‘누가 범죄를 더 잘 다룰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선 트럼프(43%) 대통령이 바이든(39%) 후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 트럼프 캠프도 이 점을 파고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8월 24~27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바이든의 미국에선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며 바이든 후보와 민주당이 폭력과 혼돈을 조장하고 경찰 예산을 삭감할 것이라는 식으로 공격했다. 그러면서 ‘법과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트럼프에 반대하는 공화당원’의 사라 롱웰 국장은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지금은 지지 여부를 재고하고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심층 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렇게 전했다.“6~7주 전만 해도 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 위기 대처 방식에 대해 팬데믹 대처 방식보다 더 명백히 화가 나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폭력과 약탈에 펄쩍 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선 여전히 비판적이지만 그들은 당장 비즈니스와 거리에서의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경제 분야에서도 강점을 갖고 있다. ‘누가 경제를 잘 다룰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48%로, 38%에 그친 바이든 후보를 10%포인트 차로 앞섰다.
◆바이든 리퍼블리컨 vs 샤이 트럼프 ‘바이든 리퍼블리컨(바이든을 지지하는 공화당원)’과 ‘샤이 트럼프(숨은 트럼프 지지층)’의 영향력도 올해 대선 승패를 가를 변수다. 민주당은 민주당 지지자와 중도층뿐만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염증을 느끼는 공화당 성향의 유권자까지 적극 공략하고 있다.
민주당은 전당 대회 때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존 케이식 전 오하이오 주지사, 멕 휘트먼 전 휴렛팩커드 회장 등 바이든 지지를 선언한 공화당 ‘빅샷’들에게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2016년 힐러리 후보 때는 ‘공화당 이탈표’가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를 수 있다. 당시엔 트럼프 후보가 기득권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로 비춰졌지만 올해 선거는 ‘트럼프 심판’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4년 전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샤이 트럼프의 영향력이 이번에 재연될지도 관건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트럼프 캠프의 선거 운동은 핵심 지지층인 백인 노동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숨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최대한 투표장으로 끌어내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인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 주에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캠프가 4년 전처럼 백인 노동자층을 공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도 많다. 바이든 후보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서민 가정 출신으로, 엘리트 이미지가 강한 힐러리 전 후보와 달리 백인 노동자층의 거부감이 덜 하기 때문이다.
바이든 후보의 최대 약점은 열성 지지층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바이든 후보 지지자 대부분은 바이든 후보가 좋아서가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이 싫어 바이든 후보를 찍겠다는 사람들이다. 미 사회 조사 기관 퓨리서치가 9월 14일 성인 1만2750여 명을 조사한 결과 바이든 후보 지지자 중 56%가 ‘트럼프 대통령이 아니어서 지지한다’고 답했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의 최근 여론 조사에선 바이든 후보 지지자의 60% 정도가 주된 지지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 반대’를 꼽았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의 4분의 3 정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선거 구도 자체가 ‘트럼프 대 바이든’이 아니라 ‘트럼프 대 반트럼프’로 짜여 있는 것이다.
게다가 바이든 후보는 코로나19를 이유로 대중 유세를 거의 하지 않으면서 존재감이 잘 부각되지 않고 있다. CNN은 바이든 후보가 50년 가까운 공직 생활로 인해 너무 오랫동안 대중에 노출돼 원로 정치인처럼 여겨진다며 유권자에게 좀 더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후보는 과거 잦은 말실수로 구설에 올랐다. ‘(1997년 사망한) 덩샤오핑과 (2016년 체결된) 파리기후변화협약을 논의했다’, ‘(2013년 사망한) 마거릿 대처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을 걱정한다’는 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후보의 인지력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TV 토론에서 ‘거짓 팩트’로 바이든 후보를 수세로 몰아넣을 가능성도 염려한다.
이 때문에 민주당 소속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트럼프 대통령과는 제대로 된 토론을 기대할 수 없다며 바이든 후보가 TV 토론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선 TV 토론은 9월 29일 인디애나 주, 10월 15일 플로리다 주, 10월 22일 테네시 주에서 세 차례 열린다.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여론 조사에서 앞서는 바이든 후보가 까다로운 인터뷰에 응할지 회의적이기 때문에 트럼프 캠프는 TV 토론을 국민 앞에서 바이든 후보를 때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이 기사는 한경비즈니스 제 1293호(2020.09.07~2020.09.13)에 실린 글입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