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내년부터 약 450조원에 달하는 국내 주식·채권 투자 결정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기준을 적용하기 위한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수익률 등 재무적 요소뿐 아니라 환경이나 지배구조 측면에서 ‘착한 기업’ 인지를 투자에 고려하겠다는 취지다. 술, 담배, 도박 등 이른바 ‘죄악주’를 비롯해 석탄발전 등 환경론자들로부터 비판받는 분야에 대한 국민연금의 투자가 중장기적으로 대폭 줄어들 가능성이 커졌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최근 국내 주식 및 채권 투자에 ESG 관점을 적용한다는 방침에 따라 평가 체계 구축을 위한 용역 과제를 발주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6월 국내주식 위탁운용 전략의 하나인 ‘책임투자형’ 펀드에 우선 적용할 새로운 벤치마크(평가기준 및 투자대상) 산출 작업을 이미 시작했다. 이번엔 주식 위탁운용(패시브)에서부터 주식 직접운용(액티브), 채권 운용 등에까지 ESG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11월 국민연금이 마련한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의 후속 조치다. 국내 주식 일부에만 머물러 있던 책임투자의 범위를 내년부터 국내 주식 전체와 채권까지 넓히고 ESG 평가 결과에 따른 투자배제(네거티브 스크리닝)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등 후속 조치와의 연계를 통해 기금의 장기 수익성을 높이겠다는 것이 국민연금의 계획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원칙을 적용하는 자산은 약 32조원(4%) 수준이다. 올해 상반기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 전체 운용자산(752조2000억원)의 59%에 달하는 국내 전통자산(주식·채권)에도 내년부터 단계적으로 ESG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얘기다. 이어 해외 주식 및 채권에도 동일한 기준을 도입할 방침이다.
국민연금이 ESG 원칙을 확대 적용하면 국내 자본시장의 지형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에서 제한 대상으로 지목한 술, 담배, 도박이나 대량살상무기, 석탄발전, 채굴 관련 종목에 대한 비중이 대폭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연금은 하이트진로, KT&G, GKL 등의 지분 10%가량씩을 보유한 대주주다. 필립모리스와 브리티시아메리카토바코 등 해외의 대표적인 담배 관련주에도 수천억원씩 투자하고 있다.
반면 국민연금의 ‘ESG 드라이브’에 대한 우려도 있다. ESG가 유럽을 중심으로 투자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긴 하지만 연기금의 장기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국민연금은 ESG에 기반한 책임투자의 수익성을 측정하기 위해 2014년 8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ESG 전략에 기반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책임투자 가상펀드’를 운용했다. 분석 결과 운용 수익률은 벤치마크보다 높았지만 변동성이 커 실제 운용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금운용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ESG를 기업평가의 핵심 지표로 활용하는 것이 자칫 기업 압박의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