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식물이 울창한 숲속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숨어 있다. 붉은색 꽃잎 뒤에는 붉은색으로, 보랏빛 식물 뒤에는 보라색으로 위장한 채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얼굴을 가린 사람들이다. 손마저 사슬에 묶여 자유롭지 않다. 눈만 내놓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 지하 전시장에 걸린 가로 316㎝, 세로 275㎝의 초대형 자수회화 작품이다. 제목은 ‘평화의 글자로 가득한 냄비(A Pot full of Peace Spells)’.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에코 누그로호(43)의 2018년 작품이다.
그는 “평화는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지구상에 진정 평화로운 장소는 없다”며 조화를 위한 전략으로 전쟁을 이용하고,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차별과 소외가 여전한 현실을 풍자한다. 자수 작품 속에서 손이 묶인 채 몸을 감추고 있는 사람들은 실제 평화를 위해 행동하지 못하는 현대인 같다.
2013년 첫 국내 전시 이후 7년 만에 열리고 있는 두 번째 개인전의 제목은 ‘Lost in Parody’. 전통 기법에 팝아트나 만화적 요소를 접목해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풍자한 자수와 회화 작품 20여 점을 걸었다.
누그로호는 벽화, 걸개그림 등 대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매체에서 시작해 조각, 퍼포먼스, 만화책 등으로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켜 국제적으로 주목받아왔다. 대학 때부터 만화를 그려온 그의 작업에는 인도네시아 신화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인형극 와양(Wayang)의 영향이 뚜렷하다. 특히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을 만큼 역사성과 예술성을 인정받는 인도네시아의 전통 염색법인 바틱과 자수 등 지역색이 강한 기법을 활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대형 자수 작품은 인도네시아의 작은 마을 주민들과 협업한 결과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누그로호가 밑그림을 그리고 주민들이 수를 놓은 자수회화는 전통자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갤러리 2층에는 화려한 붓질 속에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유화 작품들이 걸렸다. 작품은 형형색색으로 화려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쟁과 소통 부재, 환경 파괴 같은 현대사회의 각종 문제가 깔려 있다. 이는 진정한 화합과 평화를 갈망하는 작가의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