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의 급소를 잇따라 정밀 타격하고 있다. 화웨이에 이어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의 상징’으로 불리는 SMIC도 블랙리스트(거래제한 기업 명단)에 올려 반도체 기술·장비 공급을 차단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SMIC가 중국 국방사업에 관여하고 있다고 의심되는 영향이 크다.
산업계에선 “미국이 중국 반도체산업의 싹을 아예 자르려고 한다”는 분석과 함께 국내 반도체 업체로선 나쁜 소식이 아니란 평가가 우세하다. ‘2030년 파운드리시장 세계 1위’를 선언한 삼성전자, 중국 고객 비중이 높은 SK하이닉스시스템IC 등이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中 SMIC에 장비 수출 막힐 듯
6일 로이터통신은 지난 4일 미국 국방부 당국자를 인용해 “SMIC와 중국군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며 “다른 정부기관들과 협력해 SMIC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제재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보도했다. SMIC는 2000년 설립된 중국 1위 파운드리업체다. 세계 시장 점유율은 4.5%(3분기 추정치 기준)로 세계 5위다.
블랙리스트에 오르면 기업들이 SMIC에 미국 기술이 들어간 반도체 장비나 부품을 팔 때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재 화웨이, ZTE와 이들 기업의 계열사 등 275개 이상 중국 기업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화웨이뿐만 아니라 SMIC에 대한 수출길도 사실상 봉쇄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달 전만 해도 장루징 SMIC 창업자는 “미국의 제재는 강력하지 않다. 중국이 미국 반도체를 따라잡을 수 있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미국의 규제 소식이 나오자 SMIC는 “중국군과 관계가 없고 오해를 풀기 위해 미국 정부와 성실하게 소통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파운드리 타격해 첨단 칩 생산 막아
미국의 SMIC 제재는 두 가지 의도를 가진 것으로 해석된다. 우선 ‘화웨이에 대한 확실한 타격’이다. 지난 5월 미국은 화웨이와 대만 파운드리업체 TSMC의 거래를 막았다. 반도체 생산시설이 없는 화웨이가 TSMC에 5세대(5G) 스마트폰용 반도체 등의 생산을 맡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화웨이가 TSMC의 대안으로 점찍은 업체가 SMIC다. SMIC는 회로선폭 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을 주력으로 한다. 최첨단 통신칩 제조엔 한계가 있지만 중저가용 제품은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에 미국 정부가 ‘블랙리스트 등재’로 쐐기를 박으려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의 파운드리산업을 주저앉히는 것이다. 세계 반도체산업의 무게중심이 인텔 등 종합 반도체 기업에서 엔비디아, 퀄컴, AMD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로 옮겨가면서 파운드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최근 SMIC에 “약 2조7000억원을 투자하고 15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주겠다”고 발표한 것도 ‘파운드리 육성’이 반도체 굴기의 핵심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중국 정부 차원의 SMIC 육성이 가시화하자 미국이 선제 공격에 나섰다는 것이 반도체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내 파운드리업체엔 기회
미국의 중국 반도체 타격에 한국 파운드리업체의 반사이익이 기대된다. 대만 TSMC와 양강 체제를 형성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수혜가 클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SMIC가 삼성전자와 TSMC만 가능한 7㎚ 공정 진입을 노리던 ‘잠재적인 경쟁자’였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을 적극 공략 중인 국내 중소형 파운드리업체의 고객 확보가 쉬워질 것이란 관측도 있다. SMIC의 지난 2분기 매출 구성을 보면 지역별로는 중국(홍콩 포함)의 비중이 66.1%(6억2032만달러), 공정별로는 90㎚ 이상 라인 비중이 42.7%에 달한다. 이는 SK하이닉스시스템IC와 DB하이텍 등이 적극 공략하고 있는 시장과 상당 부분 겹친다. SK하이닉스시스템IC는 연말 중국 우시에 파운드리 라인을 가동하고 제품을 본격 양산할 계획이다.
황정수/김정은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