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에는 ‘역성혁명’이란 수식어구가 따라붙는다. 왕조의 개창은 혁명에 해당할 수 있는 대사건이다.
우리 역사에는 혁명에 해당하는 사건이 많지 않았으므로 정의와 개념, 평가에 대해 공감할 만한 기준이 없다. 혁명은 꼭 필요한 것일까?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진해야 하는 걸까. 성패의 기준은 무엇이며, 책임은 어느 단계까지 져야 하는 걸까.
과거 고구려의 건국은 정권 교체나 새 나라의 건국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중국적인 질서와 구시대를 타파한 후 신체재와 원조선 문화의 회복을 실행한 혁명이다. 주몽이 선언한 ‘다물(옛 땅을 수복한다는 고구려말)’의 의미는 그것이다(윤명철, 《고구려와 현재의 만남》). 왕건의 고려 건국 또한 정변을 넘어 사회체제의 전면적인 변혁을 가져온 혁명이다. 그렇다면 ‘역성혁명’이 따라붙는 조선의 건국은 어떤 혁명이며, 성패와 공과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3단계로 보는 조선의 건국 과정
조선의 건국과정은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위화도 회군과 개혁파들의 등장이다. 고려 말은 원나라의 압박과 친원파의 발호, 그들과 결탁한 권문세족들의 부패로 인하여 이미 붕괴가 많이 진행된 상황이었다. 체제불안이 심각했고, 민란도 발생했다. 대다수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했고, 명분도 충분했다. 이에 공민왕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문제는 외부상황이었다.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고, 북원의 침략과 명나라의 간섭은 고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홍건적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개경이 함락당하는 지경이었다.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들의 침입은 전 해안 지역에서 창궐했다. 국가의 안위가 심각한 수준이었으므로 최영, 이성계 같은 신흥 무인들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런데 국론과 국력, 자원의 통일이 절실한 상황 속에서 신진 사대부들은 조직적으로 개혁을 준비했다. 그런데 요동공격을 목표로 국경을 넘던 이성계의 5만 대병력이 ‘위화도 회군’이라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최영을 죽이고 우왕을 끌어 내렸다. 이성계와 손잡은 개혁파들은 왕을 옹립해가면서 권문세족들을 제거하고, 과전법을 추진해 토지의 재분배를 통해서 자기 재산을 증식했다. 정변은 결과적으로 성공했지만, 안보 위기라는 상황 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모험이었다.
2단계는 개혁파의 분열과 조선의 건국이다. 이성계,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들은 고려의 멸망과 새 나라의 건국을 추진했다. 반면에 정몽주·길재 등을 비롯한 온건 개혁파들은 외부상황과 고려에 대한 충성을 고수하느라 다른 주장을 펴고, 적대적인 행동을 했다. 결국 이방원(훗날 태종) 등 급진파는 반대파를 피로 숙청한 후 조선 건국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들이 안보위기를 감수하면서 과감하고 신속하게 추진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정변을 추진한 배경과 힘급진 개혁파의 정변 추진 배경으로는 자신감과 자기 확신을 들 수 있다.
정도전을 비롯한 이들은 정책 경험들이 있고, 외교관으로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정변의 과정과 건국 직후에 조선의 국호 선택과 왕의 즉위 허락 등 명나라와 벌인 외교와 왜구 처리 과정을 보면 자신감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성계는 요동 전투를 2번 치른 명장으로 왜구와 명의 움직임을 전략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유사시 적을 방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정변을 추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과정과 결과가 어떠하든, 정변은 백성들의 생존과 나라의 운명을 걸고 벌인 일들이었다. 만약 실패했다면 주도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재들도 대거 희생됐을 것이다. 또한 정변에 관심도 없고, 결과에 책임도 없을 뿐 아니라, 큰 혜택도 받지 못할 백성들이 희생당했을 가능성도 크다. 역사를 살펴보면 혁명을 계획하고 주도한 부류들이 실제로 다수의 백성을 고려한 흔적들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개혁과 정변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은 어떤 사회적 성분과 사상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을까?
그들은 성균관과 지방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된 학자적 관리들이다.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비판의식이 강한 이상주의자와 야망을 실현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도전과 같이 신분이 한미하거나, 권문세족들의 대토지 소유로 인해 중소 토지만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기득권에 막혀 중간관료에 머물렀다. 따라서 권문세족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세력들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책으로 대거 정계에 등장해 세력을 이룬 이들은 '내우외환'이라는 고려사회의 위기를 통감했다. 따라서 개혁이라는 전선을 구축한다는 뜻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과 학문적인 기반, 가계의 차이 등으로 점차 입장에 차이가 생겼고, 온건파와 급진파로 분열됐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라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영이 죽고 우왕이 쫓겨나자 온건파들의 위기감은 최대치로 증폭됐다. 결국 두 세력은 권력투쟁을 벌였고, 온건파의 대표였던 정몽주는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이색·길재 등을 비롯해 ‘두문동 72인’ 등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다가 숙청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정도전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
3단계는 건국에 성공한 이들이 사회를 개혁시키는 혁명과정과 권력투쟁이다. 급진 개혁파들은 다시 2부류로 분열됐다. 하나는 힘을 장악한 이성계와 방원 등의 무장들과 조준 같은 학자들이었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의 실질적인 주역이었고, 혁명의 이론과 정책의 근본 틀을 만든 정도전 중심의 강성 개혁자들이었다.
정도전이 주도해 추진한 혁명의 내용과 성격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정도전은 학식이 뛰어나고, 한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인 장량을 자처할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지니기도 했다. 이성계를 자기 목표를 실현하는 야망에 끌어들이고, 끝내 성공하게 한 사람이다. 개혁 추진 이전부터 혁명에 이르는 과정 내내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사회개혁의 핵심인 토지의 경작과 분배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부분적으로 실천했다. 철저한 이론무장으로 성리학을 정치와 정책에 활용해 권문세족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불씨잡변'을 집필 기득권인 불교세력을 붕괴시켰다. 외교관의 경험을 살려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명나라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보였다.
반면 요동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명의 황제인 주원장의 위협을 받았다. 결국은 이방원에게 죽임당하는 명분을 제공하기도 했다. 진나라의 ‘한비자’처럼 법률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법치주의 사회의 정착을 도모했고, 백성의 이익을 소중하게 여겼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民은 복종하지만 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그가 쓴 '조선경국전'에 나오는 글이다. 나아가 개인과 혈통에 중심을 두는 왕권보다는 조직과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정치와 재상정치를 추진했다(김당택, 《조선왕조 개창》). 또 과거제도가 활성화되고, 서당 등의 교육기관이 전국에 걸쳐 만들어지는 등(민병하, 《한국중세교육제도사 연구》) 교육의 수혜 범위가 확대됐다. 결국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가 추진했던 많은 정책은 정적인 태종에 의해 수용됐다. 이후 세종 때 꽃을 활짝 피우면서 조선은 질적으로 변신했다.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났던 이상주의 정치가이며, 성공한 혁명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은 군사력을 동원한 권력쟁탈전을 넘어 이론과 실무능력을 겸비한 개혁세력이 청사진을 갖고 추진해서 성공한 혁명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정도전 등이 선택한 이론과 추진한 정책 등은 몇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왕권과 신권과의 영원한 정치투쟁을 낳았고, 학자적인 관료들의 무능과 교조성, 성리학의 중시로 인한 산업의 억제와 자주성의 상실 등이 심화했다. 이러한 폐해들은 조선 사회에 점점 암울한 기운을 드리웠고, 백성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지, 혁명의 추진 세력들이 그것까지 감당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개혁과 혁명이라는 단어들이 난무하는 국난의 상황.
어떤 성격의 주체들이, 어떠한 이론과 청사진을 갖고, 무슨 방식으로 위기를 극복할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전체가 공평한 권리를 갖고 책임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진영논리로 개혁과 혁명을 대하는 방식은 결코 옳은 태도가 아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