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당연히 있습니다. 증거 없이 기소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지난 1일 기자들 앞에 선 이복현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부장검사는 이같이 말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법정에 세우기로 한 검찰의 결정을 두고 기자들이 "이 부회장이 합병 작업에 직접 관여했다고 볼 수 있는 '스모킹건'이 있냐"는 질문을 던지자 "이 부회장의 공모를 인정할 수 있는 진술 증거도 확보했다"고 답했다. 밝힐 수 없다(?)는 '스모킹 건'그러나 이날 검찰이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 어디에도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직접 관여했다는 결정적인 '한 방'은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기자들이 비슷한 질문을 이어가자 수사팀은 "이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검찰 일각에선 이 부회장의 목소리가 담긴 회의 녹취파일일 것이란 얘기도 나왔다.
삼성을 둘러싼 길고 지루한 재판이 다시 시작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이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삼성그룹 경영권을 승계받는 과정에서 각종 불법 행위가 벌어졌다는 의혹을 두고 검찰 수사가 21개월만에 종결됐다. 시작은 2018년 12월이었다. 시민단체와 금융위원회 등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며 삼성바이오를 검찰에 고발했다. 국내 1위 대기업의 '세대 교체'를 둘러싼 논란인 만큼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기소의 타당성을 두고는 계속해서 뒷말이 나올 듯하다. 우선 검찰수사심의위원회의 권고를 거스르고 기소를 강행했다는 점이 수사팀의 발목을 잡는다. 이를 두고 이 부장검사는 "지난 6월 말 수사심의위가 열린 이후 두 달 동안 각계 전문가 30여명의 의견을 듣고, 수사 내용과 법리 등을 심층 재검토했다"면서도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이같은 사건 처리에 이르게 됐다"고 했다.
검찰이 스스로 만든 개혁 방안 중 하나인 수사심의위 권고에 어긋나는 결정을 했다는 얘기인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스모킹 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진 않았다. 향후 재판 과정을 염두에 뒀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사안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이해는 여전히 제자리를 멤돌 수 밖에 없다. 차장결재는 건너 뛰다...왜?기소 결정 과정에서 '차장 패싱'이 일어난 점도 의문을 낳는다. 검찰의 기소는 통상 수사팀의 부장검사와 차장검사, 지검장 등의 승인을 순서대로 받은 뒤 결정된다. 반면 이 부회장 사건의 경우 차장검사를 건너 뛰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직접 결재했다. 결재라인에 있는 3차장검사가 지난 검찰 고위간부 인사로 공석인 상태인데, 현재 직무 대리중인 이근수 2차장검사가 대리 결제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수사심의위와 반대되는 검찰의 결정에 차장검사가 부담을 느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이 부회장의 혐의점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결재를 하지 못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총 437권 21만4000여쪽. 소환한 사람만 약 300명, 면담 횟수만 860여회. 21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검찰이 남긴 기록이다. 수사를 이끈 이복현 부장검사는 3일 대전지검 형사3부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현 수사팀은 앞으로도 계속 공소 유지에 참여할 계획이다. 이 부장검사도 공판팀에 합류해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법정에서의 절차를 준비한다. 수사팀의 핵심 멤버인 김영철 의정부지검 형사4부장은 서울중앙지검 특별공판2팀장으로 재판 과정을 이끌 예정이다.
검찰의 끈질긴 노력과 방대한 수사 기록 앞에선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유죄를 입증할 '스모킹 건'이 없다는 비판을 무릅쓰고 감행한 굴지의 기업인에 대한 공소제기가 '무리한 기업수사'의 대명사가 되지 않길 바란다.
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