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와 정부 간 갈등이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배경에는 2000년 의약분업 갈등이 녹아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합의 조건으로 약속한 의대 정원 축소를 문재인 정부가 번복하면서 의사 사회 내부에서 강경 투쟁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 문제가 정치 쟁점으로 변질된 것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김대중 정부 약속 깬 문재인 정부김대중 정부는 2000년 약사가 조제권을 독점하는 의약분업을 시행하는 조건으로 의대 입학 정원을 줄이기로 의사들과 약속했다. 의사들이 조제권을 약사들에게 주는 대신 의사 수를 제한하는 ‘딜’이 이뤄진 셈이다.
이를 통해 당시 3253명이었던 의대 정원은 노무현 정부를 거쳐 2006년 3058명으로 줄었다. 지금까지 이 정원이 그대로 유지됐다. 의사들은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2022학년도부터 10년간 의대 정원을 4000명 늘리기로 합의한 것을 두고 정부와의 약속이 깨졌다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 내놓는 중재안조차 신뢰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의약분업 당시 동네의원이 주축이던 집단휴진에 동력을 불어넣은 것은 대학병원 전공의다. 20년이 지난 지금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인 이들은 대학병원 교수직 등을 맡고 있는 의료계 주축이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2000년 의약분업을 경험한 의사들은 끝까지 싸우지 못해 잘못된 의료제도가 고착화됐다고 생각한다”며 “전공의, 전임의가 빠져 교수들의 업무 피로도가 높아져도 이를 감수하겠다는 의사가 많은 이유”라고 했다. 정치권 경솔한 행동이 논란 부채질정부와 정치권의 경솔한 행동은 의사들을 더 자극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시민단체 등의 추천으로 공공의대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공식 블로그에 올렸다가 삭제한 데 이어 ‘의사=공공재’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5일 재난기본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면서다. 의사들은 이 법안이 재난관리자원의 범위를 물적자원에서 인적자원으로 확대한다는 이유로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유행 상황에 의사를 물자처럼 동원하겠다는 것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의사들이 입법예고 중인 이 법안에 반대글을 올리면서 등록된 의견만 2만여 건에 이른다.
26일 여야가 코로나19 관련 법안을 숙려기간 없이 처리하기로 합의한 것을 두고도 의사들 사이에서는 “공공의대 신설 등 각종 법안 신속 통과를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다. 지역 의대는 물론 간호대·약대도 이권의대 정원 논란이 정치논쟁으로 번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의대, 간호대, 약대 등이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는 창구가 되면서 지역 대학이 이들 대학 정원을 배정받는 것은 큰 이권이 됐다.
지역 대학에 전문 의료인을 양성하는 분과대학이 생기면 취업률이 높아지고 대학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병원이 함께 설립되면 이곳에 근무하는 인력, 환자 등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이는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 의대 등이 대학 장사에서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구 정치인이 사학에 의대, 간호대, 약대 등의 정원을 가져다주면 선거 승리 보장수표’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역구에 의료인력 정원을 가져오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는 지역의 의료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 발표한 지역의사 제도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한정호 충북대 의대 교수는 “복지부의 정책 실패로 자초한 지역불균형을 다시 지역 의대정원 늘리기로 해결될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라며 “선거를 겨냥한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은 복지부가 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2018년 말 발간한 보고서에도 상세히 나와 있다. 당시 연구팀이 복지부에 제출한 진단은 이렇다.
“의사가 대도시,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이유는 도시 지역이 여러 측면에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의사 수를 늘리는 방안으로는 의료기관 종별·지역별 의사 불균형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방중소 병원과 취약지 인력 양성 및 배치를 위해서는 조건부 면허 의사 제도 도입, 취약지 의료 수가 신설, 공중보건장학 제도 등의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