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젊은 의사들…"의대 설립 총선공약에 우리만 희생"

입력 2020-08-26 17:03
수정 2020-08-27 00:50

“4차 단체행동은 블랙아웃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휴대폰을 끄고 모든 SNS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김중엽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장은 26일 500여 명의 소속 전공의들에게 이렇게 공지했다.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항상 콜(전화)을 받는 전공의들에게 휴대폰은 환자와의 연결고리다. 이를 끊겠다는 의미다. 젊은 의사들의 집단 휴진으로 국내 대학병원들이 멈춰서기 일보직전이다. 동네의원이 주축이 됐던 2000년 의약분업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불공정한 사회에 대해 반감을 참지 못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뺏길 수 있다는 분노, 정부 협상 과정의 불합리성 등을 겪으며 투쟁 동력을 올리고 있다는 평가다. 결집하는 젊은 의사들 문재인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에 반대해 의사들이 단체행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7일이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전공의들이 병원 밖으로 나와 의대 증원, 공공의대 설립, 한약 건강보험 확대 등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당시 전공의 1만3571명 중 69.1%가 참여했다. 하지만 하루 휴진 여파는 미풍에 그쳤다.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14일 의료계 집단 휴진에 참여한 데 이어 21일부터 무기한 휴진에 들어갔다. 의대생들은 수업 참여를 거부했다. 의사 면허시험을 봐야 하는 본과 4학년생의 92.9%인 2800명이 국시 실기시험에 응시하지 않기로 했다.

전공의는 의사 면허를 딴 뒤 전문의 면허를 따기 위해 대학병원 등 수련병원에서 교육받으면서 일하는 의사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이 주축이다. 의료 기술을 익히는 단계이기 때문에 주 80시간 넘게 일하면서 400만~500만원 정도 월급을 받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 전임의가 된다. 전문의 면허를 딴 뒤 세부 전공과목의 기술 등을 익히기 위해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다. 업무 강도가 높아 ‘펠노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불공정한 현실에 반기젊은 의사들에게 의약분업은 남의 일이었지만, 의대 정원 확대는 자신들에게 닥친 일이다. 당장 의사가 늘면 개원해 사회에 진출한 뒤 경쟁자가 늘기때문이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과거 선배 세대 의사들은 희생하는 직업이라는 인식이 강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지만 요즘 세대 의사들은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그는 “14일 집단행동을 금지한다는 서울대병원 인재개발실의 통보가 이 병원 전임의들을 결집시킨 것처럼 자율성과 자신들의 가치가 중요한 세대”라고 했다.

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이 ‘불공정한 의사 선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반감도 젊은 의사들을 자극했다. 젊은 의사들은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딸의 병리과 논문 제1저자 논란을 보고 큰 상실감을 느꼈다. 제1저자는 의사들이 수년간 담당 교수 연구를 보조하면서 겨우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기 때문이다. 당시 의사 96%가 논문 등재를 철회해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지역의사와 공공의사제도를 통해 ‘외부 추천 전형으로 들어가는 의대생이 늘 것’, ‘한의사가 보수 교육만 받으면 의사가 될 것’ 등의 소문이 확대되는 이유다. 보건복지부는 모두 아니라고 했지만 의사들은 이런 해명을 믿지 않는다. 정부의 일방적 정책 결정이 도화선정부와 의사 간 협상 과정에서 ‘의사는 공공재’라는 발언이 나오고 일부 공무원이 젊은 의사들을 후배 대하듯 한 것도 논란이 됐다. 의대 정원을 확대하는 시기도 석연치 않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으로 바쁜 시기에 굳이 논란이 일 것이 뻔한 사안을 강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달 23일 당정 발표 직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정원 확대에 앞서 토론과 의견 수렴 등 공개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발표가 급히 진행되다 보니 정치적 뒷배경이 있다는 의혹만 커지고 있다. 의사들 사이에서는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표밭인 목포와 남원 등 호남 지역에 의대를 세우기 위해 2022학년도부터 의대생을 뽑도록 정책을 밀어붙였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정치권도 논란을 부추겼다. 목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내건 공약 중 하나가 목포대 의대 설립이다. 지난달 23일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이 공개된 직후 그는 “전남지역 의대 설립이 확정됐다”며 “목포대 의대 설립이 시작된다”고 했다. 순천, 포항, 창원, 안동시 등도 의대 유치전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 의원은 “‘기승전 목포의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 의원이 목포의대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무부시장을 지낸 김 의원이 정치력을 이용해 밀어붙이고 있다는 얘기가 여당 안팎에서 들린다”고 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남원에 공공의대를 세우고 목포에 의대를 새로 여는 것에 관한 논의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목포대, 포스텍 등에 의대를 새로 세우기 위해선 10년간 4000명을 늘리는 의대 증원 계획 외에 추가로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