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가 고려가 멸망하기까지 왜구의 침략은 큰 역할을 했다. 몽골과 원나라에 시달린 고려는 말기 40여 년간 왜구에게 무려 591회에 달하는 침략을 받았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후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다 ‘임진왜란’이란 정규군의 공격으로 대체됐다. '해적 집단'을 넘은 왜구의 정체우리는 왜구를 약탈과 살인을 일삼은 ‘일본 해적 집단’이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왜구는 고려의 멸망에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수많은 백성들의 생존과 생활을 탈취했다. 둘째, 해안가 주민들에게 수백년간 피해를 끼쳤을 뿐 아니라 ‘약탈’이란 불안 속에서 살게 했다. 셋째, 고려가 공도정책을 추진하고, 조선이 쇄국 정책과 해양천시 정책 등을 실시하는 명분과 계기를 제공했다. 넷째, 우리민족은 항상 피해자였다는 패배감을 느끼게 했고, ‘한(恨)’이라는 자기 위안에 빠지도록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구의 정체를 정치적이고 군사적이며, 문화적인 관점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동아지중해에서는 해적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중국은 강력한 ‘해적’ 들이 발호해 세상을 변혁시키거나 역사의 전환을 일으킨 예가 많다. 신라는 초기부터 ‘왜’라는 수식어로 표현한 집단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다.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태왕 비문에 처음 기록된 ‘왜구’라는 집단에 대대적으로 공격받았다고 전해진다.
반면 9세기에는 ‘신라구’라는 신라 해적들이 훗날 왜구의 거점인 대마도, 오도열도 등 일본의 남부 해안과 정부를 괴롭혔다. 11세기에는 여진해적인 도이적(刀伊賊)들이 고려의 동해안은 물론 일본열도까지 침공해 고려 수군이 북쪽 정벌을 시도했다. 그리고 13세기에 우리가 아는 ‘왜구(倭寇)’들이 동아시아 세계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다.
역사에서 해적은 단순한 도적 집단을 넘어 여러 인종과 문화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운영하며 무역을 조직적으로 행하는 국제 상인이었다. 때로는 본격적인 무장력을 갖춘 채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정치 집단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왜구에게 이러한 해적 개념을 적용시키고, 심지어는 아시아의 ‘바이킹’ 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도 한다(윤명철, 《한민족 해양활동 이야기 2》). 또한 15세기 이후의 후기 왜구들은 일본인들이 주도한 다국적 집단이며, 중국이나 심지어는 한국인도 섞였다는 주장도 한다. 물론 ‘가왜구(假倭寇)’라는 왜구로 가장한 고려인들이 있었다(고려사). 하지만 고려 시대의 왜구를 주도한 압도적인 구성원은 일본의 지방 호족세력들과 연합한 준 군사집단이었다. 다만 조선 시대에 동아시아 세계에서 활동했던 왜구는 중국인들이 매우 많았다. 왜구의 끝없는 침략과 고려의 대응
왜구는 중국 해안과 연해주 일대까지 약탈했지만, 주로 고려에 집중됐다. 1223년 5월, 2척이 김해 지역을 공격하면서 1225년과 1226년에 해안을 침입했다. 고려는 즉각 규슈의 다자이후에 사신을 파견해 왜구의 발호를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피난한 강도(강화)정부 때와 삼별초 정부가 남해안 지역을 장악했던 때에도 해안을 공격했다. 당시에는 소수인원이 탄 몇 척의 배로 구성된 해적의 성격이었고, 1265년까지 11회뿐이었다.
그런데 14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다른 양상으로 고려를 공격했다. 80년 만의 공백을 깨고 1350년 2월부터 대규모 침략을 개시했다. 같은해 4월에는 100여 척, 5월에는 66척, 6월에는 20척이 침공했고, 11월에도 침공했다. 이어 1351년 8월에는 130척이 영종도 일대와 남양반도 일대까지 공격했고, 남해안 전체를 약탈했다. 공민왕이 즉위한 1352년에는 강화도를 공격했다. 이후 예성강을 타고 올라왔으나 개경 앞에서 패배했다. 6월 하순부터 서해안과 동해안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다. 1358년 3월에도 400여 척이 현재 NLL 지역인 배천 지역을 공격하고, 고려 선박 300여 척을 소각했다. 1361년부터 남해안의 전 지역을 약탈했다. 1363년 4월에는 213척의 선박으로 교동도를 점령하고, 김포반도를 휩쓸어 수도권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다음해에는 200여 척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 및 내륙을 공격했고, 심지어는 예성강 하구인 창릉(왕건 아버지 릉)에서 쿠빌라이칸의 영정을 탈취했다. 1371년 7월에는 예성강으로 진입해 수도 함대격인 병선 40척을 불태웠다. 조운선을 수시로 약탈하고 파손시키자, 개경으로 세금이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정부는 해로조운을 정지하고 육운으로 변경시킬 정도였다(고려사).
왜구들은 공민왕 20년 동안에만 100여 회 넘게 침략했으며, 우왕 때는 14년 동안에 378회나 쳐들어왔다. 1350년~1392년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591회나 침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왜노들의 침략으로 나라는 이미 섬의 물고기·소금·목축의 이익을 잃었고, 또 곡식이 나는 기름진 들판을 잃었다(고려사 우왕 14년 조)”고 토로했다. 또 연해의 수천리 지역에는 인가에서 연기가 끊어졌다는 기록이 있다(세종실록). 정부는 1377년에는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려는 논의까지 했다.
고려는 결국 뒤늦게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태도를 버렸다. 하지만 처음에는 공격 대신 회유책을 사용했다. 공민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고, 대마도 만호에게 쌀 1000석을 주고, 귀화를 원하는 왜구에게 남해안의 일부 지역을 거주지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도 왜구는 1374년 4월에 전선 350척을 동원해 합포(마산)로 진입했다. 왜구의 해적선은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에서 200여 명, 소선은 40~80명 정도가 승선이 가능했다. 이에 비춰 400~500척씩 선단을 구성했으니 마치 전면전 같은 양상이었다. 이때 벌어진 해전에서 고려는 40척이 손실되고, 5,000명이 전사하며 패배로 끝났다.(국방군사연구소, 《왜구토벌사》)
고려를 집중적으로 공격한 이유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현상 때문이었다. 왜구들의 거점은 주로 대마도 이끼섬, 오도열도 등 규슈 북부 일대여서 식량이 부족했다. 또 여몽연합군이 침공하고 약탈한 데 대한 보복전인 의미도 있다고 풀이된다. 해당 지역들은 지정학적으로 섬들이 많고, 쿠로시오(해류)와 계절풍 등을 이용해 한반도로의 항해가 용이한 환경이었다. 또한 역동성이 강한 해양인의 기질과 약탈경제의 불가피한 구조적 문제도 한 몫 했을 것이다.
해적 집단 세력의 성장 배경
그런데 해적 집단들은 어떻게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14세기에 이르자 원나라는 부정부패로 혼란이 극심했고, 자연재해로 생활이 비참해진 백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명나라는 1367년에 건국했으나 북쪽에서는 북원과 싸움을 계속했다. 바다에서는 장사성 등 해양세력과 충돌 중이었다. 한편 일본은 여몽연합군의 2차례 공격을 방어했으나 막부의 재정 부족으로 무사들의 이탈이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탈한 무사들은 농민·어민들과 합세해 해적의 전력으로 탈바꿈했다. 이어 막부의 교체기인데다가, 남북조 간에 벌어진 60여 년 동안의 전투에서 패배한 남조 군인들 일부가 해적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일본은 왜구를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우호적인 편이었다고 한다(이영, 《잊힌 전쟁 왜구》).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여몽연합군의 참전 등으로 인해 국력은 물론이지만, 군사력 특히 해군력이 약화했다. 만약 고려가 국제정세의 흐름과 동아지중해의 자연환경, 해양세력 체계를 이해했다면 이러한 시대의 도래를 방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질서의 변화가 생기고, 공민왕의 반원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고려는 왜구와 적극적인 대결을 벌이기 시작했다. 최영과 이성계가 등장해 왜구를 격파했고, 우왕 때인 1380년에 최무선이 최신 화약무기를 이용해 진포대첩에서 승리했다.
고려는 결국 1389년에는 대마도 정벌까지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두 명의 영웅을 배출했고, 이 두 사람은 고려의 운명을 놓고 각각 다른 방식을 취한다. 바로 최영과 이성계다. 두 영웅은 고려의 존재와 백성의 행복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1388년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결국 1392년에 조선을 건국했다.
해양세력으로 건국한 고려는 해군력이 붕괴하도록 방치했다. 이후 해양분쟁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왜구에 수세적이었고, 결국 멸망했다. 왜구에 대해 '해안가를 약탈하는 단순한 해적집단'이란 인식을 버려야 한다. 백성들의 생존과 생활을 붕괴시키고, 고려의 멸망을 초래한 군사집단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또한 현재는 중국 어선이 우리의 해양주권을 무시하고, 어업을 방해하고 공권력까지 공격하는 준군사 집단으로 보여진다. 중국 어선들이 미래에 동아시아와 우리의 해양을 위협할 존재로 부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