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국판 뉴딜' 띄우기에 연일 열을 올리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일 "내년 예산안에 한국판 뉴딜 관련 재정을 20조원 이상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달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을 통해 2025년까지 114조원의 나랏돈을 투입하겠다고 했는데, 당장 내년부터 '통 큰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20조원이면 올해 전체 일자리 예산(25조원)과 맞먹는 수준이다. 문화·체육·관광·환경 예산(16조8000억원)을 합친 것보다 많다.
공공기관도 총동원됐다. 홍 부총리는 이날 '한국판 뉴딜 뒷받침을 위한 공공기관 역할 강화방안'을 발표하며 "공공기관이 한국판 뉴딜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공기관이 집중 추진할 뉴딜 관련 프로젝트를 177개 발굴하기로 했다. "기관별로 전담 태스크포스(TF)를 꾸리고 뉴딜 성과창출 세부계획을 만들어 제출하라"고도 했다. 일각에서는 막대한 투자 규모나 공공기관을 앞세운 것 등이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과 비슷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정부는 부동산에 쏠리는 시중 유동성을 한국판 뉴딜로 끌어들이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국민참여형 한국판 뉴딜펀드' 조성을 통해서다. 뉴딜 종합계획에 따르면 2025년까지 뉴딜에 투입될 민간 자본은 20조7000억원이다. 이를 감안하면 뉴딜펀드 규모는 최소 수조원 이상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홍 부총리는 "빠른 시일 안에 뉴딜 펀드 조성 방안을 확정해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한국판 뉴딜이 현 정부 후반기의 '대표 주자' 사업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정부 바깥에선 "불안하다"는 시각이 많다. 이렇게 막대한 투자를 할 만큼 알맹이가 있는 사업인지 의심스럽다는 우려가 대부분이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이 포스트코로나 시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경제·사회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단기적 경기 대응, 부양 대책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한국판 뉴딜의 대다수 사업은 이미 범용화된 기술을 단순 소비·활용·보급하는 것들이다. 초·중·고교 전체 교실에 와이파이를 깔고 오래된 컴퓨터와 노트북을 교체해주는 사업이 대표적이다. 공공임대주택 등에 고성능 단열재를 깔고 학교에 태양광 시설을 설치하는 그린리모델링 사업도 단순 보급 사업에 가깝다. 그린리모델링 사업엔 2025년까지 6조3000억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이에 대해 "범용화된 기술을 단순 소비하는 사업들이 단기적 경기 부양 효과는 있겠으나 중장기적 성장동력을 확보하겠다는 한국판 뉴딜의 목표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특히 노후 기자재 교체 사업 관련해서는 "한국판 뉴딜이 아니었어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사업 아니냐"고 꼬집었다. 단순 보급에 급급할 게 아니라 신기술 개발과 신산업 인프라 확충에 집중해야 미래 먹거리를 발굴할 수 있다는 게 국회예산정책처의 지적이다.
단순 보급에만 매몰되면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정책에서 이미 드러났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국에 태양광·풍력 등 발전소를 크게 늘리고 있다. 하지만 2018년 국내 신재생에너지 제조업체의 고용 인원은 전년보다 3.9% 줄었다. 매출은 9.8%, 투자는 85.7%나 감소했다. 신재생에너지 발전소의 핵심 설비와 기자재를 독일, 중국 등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어서 국내에 발전소가 늘어봤자 열매는 외국 기업이 따 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한국판 뉴딜의 3대 축 중에 하나로 그린뉴딜이 들어갔지만 이전처럼 보급 확대 사업만 잔뜩 들어갔다"며 "재생에너지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전 정부 정책에서도 단골로 지적됐던 '백화점식 대책 나열'이란 문제를 한국판 뉴딜이 똑같이 재현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한국판 뉴딜의 세부 사업은 74개에 이른다. 내년 20조원이 투자된다고 가정하면 한 사업당 2700억원꼴이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될 만한 사업에 수조원을 투입해도 미래 먹거리가 될 '히트 상품'이 나오기 힘든데, 이렇게 자잘하게 예산을 나눠 뿌려서 제대로 된 성과물이 나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유럽연합(EU), 중국 등 주요국의 정책 기조와도 대비된다. 이들 국가도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비한 미래 전략을 내놓았으나 뉴딜과 같은 거창한 표어 없이 '신산업 관련 인프라'에 집중 투자하는 모습이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올 3월 5세대(5G) 통신·데이터·인공지능(AI) 등 신인프라에 2025년까지 1조2000억위안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EU는 AI 산업에만 매년 200억유로씩 10년간 투자하기로 했다.
대부분 전문가들이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필수라고 손꼽는 사업들도 일부 한국판 뉴딜에 포함돼 있긴 하다. 빅데이터 구축 사업이 그것이다. 유성준 세종대 인공지능-빅데이터연구센터장은 "전세계적으로 제조업을 포함한 모든 산업이 데이터 기반으로 개편되고 있기 때문에 양질의 빅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AI,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고도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분야별 빅데이터 플랫폼을 30개 만들고, AI 학습용 데이터를 1300종 구축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사업도 세부 추진 전략이 정밀하지 못해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빅데이터를 최대한 확보하는 건 중요하지만 하나를 만들더라도 민간에서 널리 쓸 만한 양질의 데이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며 "그러려면 사전에 활용도가 높은 데이터를 선별하는 등 면밀한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지금은 데이터 구축에만 급급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사업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많이 투자해달라"며 펀드 조성에 속도를 내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범정부적으로 밀고 있는 사업이니 뉴딜 펀드에 투자금이 많이 들어올텐데 나중에 손실이 나면 투자자들만 '독박'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도록 사업의 실효성을 높이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본적으로 금융 투자는 기업과 기술을 보고 하는 것인데, 정부 주도의 인프라 보급·확충 사업에 민간 투자를 끌어들이겠다는 구상부터가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