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시장에는 숫자와 이야기가 있다. 투자자들은 숫자와 이야기로 투자 정보를 접하고 매매 결정을 내린다. 숫자는 기업 실적부터 금리, 환율 같은 거시경제 지표까지 매우 다양하다. 금융공학의 발달로 복잡한 수식으로 계산한 투자 참고용 숫자도 부지기수다.
숫자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장점이 있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주식 투자에 진지하게 임하는 일부는 그런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하지만 대다수는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에 의존한다. 이야기도 여러 가지다. 가장 흔한 형태는 여러 숫자의 의미와 그 숫자들 간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증권사 보고서가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OO전자는 신제품 OO의 판매 호조로 실적 전망치가 OO% 높아져 주가수익비율(PER) OO배를 적용할 수 있어 목표주가를 OO% 올린다’는 식이다.
숫자보다 이야기에 치중하는 경우도 있다. 증권가 은어인 ‘마바라’가 대표적이다. 마바라는 엉터리, 바람잡이, 허풍쟁이 등의 의미로 통한다. 소액투자자를 뜻하는 일본말이 한국 증시에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얕은 지식을 가지고 청산유수처럼 떠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가 됐다.
문제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마바라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야기의 힘 때문이다. 강력한 이야기를 들으면 뇌에서 옥시토신이 분비되고 그 물질이 듣는 사람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거나,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되면 희망과 낙천적 생각을 촉발하는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사실은 연구 결과로 확인됐다. 같은 내용을 담은 이야기와 설명문을 읽게 한 뒤 기억력을 테스트했더니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 내용을 50% 더 잘 기억했다는 실험 결과도 이야기의 힘을 보여준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 회사가 OO를 개발해서 OO에 팔면 진짜 엄청난 기업이 될 거야”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복잡하고 어려운 숫자는 필요 없어진다. 성공적인 투자 결과에 대한 기대가 도파민과 옥시토신 분비를 자극하고 행동(주식 매수)을 이끈다.
그런 이야기가 실제 성공 스토리가 된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숫자가 뒷받침되지 않은 성장과 성공을 꿈꾸는 이야기는 ‘마바라의 썰’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야기에 깊이 공감해서 지인들에게 전했다면 자신도 마바라 소리 듣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주식시장은 ‘코로나19가 뭐였지’라고 할 정도로 무섭게 뛰고 있다. 많이 오른 만큼 ‘이제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도 함께 자란다. 그렇다고 주식을 팔고 현금을 들고 있을 수도 없다. 이 시점에서 의지할 수 있는 성장과 성공의 스토리가 절실한 상황이다. 시장에는 언제나처럼 스토리가 넘쳐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러티브&넘버스》’의 저자 애스워드 다모다란 미국 뉴욕대 교수는 스토리를 ‘3P’ 시험으로 평가하라고 조언한다. 1단계는 가능성(possible), 2단계는 타당성(plausible), 3단계는 개연성(probable)이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가 모두 타당하지는 않고, 타당성을 통과해도 개연성을 가진 것은 소수라는 것이다. 스토리와 숫자를 연결시켜야 하고 스토리는 거시경제 요인, 경쟁자의 등장 등으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하라고 강조한다.
저금리로 이야기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는 주장도 있다. 이효석 SK증권 자산전략팀장은 “그동안 우리는 다음 분기 실적, 내년 실적 전망에 기반한 투자에 익숙했는데, 저금리 환경에서는 3년, 5년 후 현금흐름을 예측하는 내러티브(이야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먼 미래의 현금흐름을 예측하면 자칫 사기꾼(마바라)이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런 예측 능력이 중요해진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란 얘기다.
마바라와 내러티브를 구분할 수 있는 투자자의 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장경영 한경 생애설계센터장 long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