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의원의 배신…"파업 핑계로 휴가 떠났다"

입력 2020-08-14 16:58
수정 2020-08-15 02:24

14일 칼에 손을 베여 큰 상처가 난 직장인 이모씨(42)는 회사가 있는 서울 광화문 일대 병원 네 곳을 돌았지만 허탕을 쳤다. 이날은 대한의사협회가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정한 집단 휴진일이었다. 이씨는 다섯 번째 찾은 병원에서 겨우 치료를 받았다. 그는 “대부분 병원이 오늘을 포함해 17일까지 여름 휴가를 떠난다고 입구에 써붙여놨다”며 “정부 응급의료포털에 ‘진료 가능’이라고 표시된 병원들도 막상 가보면 문이 닫혀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한국경제신문이 여의도 광화문 대학로 등 서울 주요 지역별로 병원 10곳을 둘러본 결과 평균 3~4곳에 ‘여름 휴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정부 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집단 휴진일에 맞춰 여름 휴가를 떠난 의사들이 많았다. 여의도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한 약사는 “오늘부터 파업이고 17일이 임시공휴일이어서 겸사겸사 휴가를 간 곳이 많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는 병원이 문을 열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응급의료포털 이젠을 활용하라고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이트에선 문을 열었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휴가를 떠난 병원도 적지 않았다. 이젠을 보고 경복궁역 인근의 한 정형외과를 찾았다가 헛걸음을 한 직장인 정모씨(34)는 “정부 기관이 운영하는 사이트라 믿고 병원을 찾아왔는데 ‘휴가 중’이란 안내글이 붙어 있어 황당했다”고 말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이젠에 나온 정보는 지방자치단체가 접수한 사전 휴진신고 등에 기초한 것”이라며 “방문 전 전화로 실제 진료 가능 여부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복지부에 따르면 전국 의원급 의료기관 3만3836곳 중 14일 오후 5시 기준으로 1만1025곳(32.6%)이 의협의 지휘에 따라 휴진 신고를 했다. 하지만 여름 휴가를 이유로 문을 닫은 병원 중에는 집단 휴진 신고를 하지 않은 곳도 있어 실제 휴진율은 이보다 높다는 게 정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의협은 이날 여의도에서 2만8000여 명(주최 측 추산)이 참석한 가운데 총파업 궐기대회를 열었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정부가 ‘4대악 의료정책’을 기습적으로 쏟아내고 어떤 논의나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질주해왔다”며 “13만 의사 회원들의 의지를 담아 다시 한번 철폐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의협은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비대면 진료 도입을 ‘4대악 의료정책’으로 규정하고 정부에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최 회장은 “정부가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달 26∼28일 2차 총파업을 단행한 뒤 무기한 파업으로 이어나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동석 대한개원의협의회 회장은 “현재 부족한 것은 의사 숫자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김강립 복지부 차관은 “그간 의협이 요청한 협의체 구성을 수용하고 정책 논의를 하자고 거듭 제안했음에도 집단 휴진을 결정한 것에 대해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환자들의 생명과 안전에 위험이 초래될 수 있는 집단행동을 감행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 인력 확충은 보건의료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라고 덧붙였다.

양길성/박상익 기자 vertig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