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서구 사회 중심으로 이뤄진 세계화가 변곡점에 이르렀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도전이 더 강렬해지고 서구 문명이 세운 세계 표준은 다시 검토될 것이다.”
원로 서양사학자 이영석 광주대 명예교수는 저서 《잠시 멈춘 세계 앞에서》에서 코로나19가 퍼진 뒤 세계사 흐름의 변화를 이렇게 전망했다. 그는 “변곡점을 지나며 지난 두 세기 동안 미국이 세계를 지배했던 ‘앵글로-아메리카니즘’이 몰락하고 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여줬던 허술한 방역 대책이 이를 입증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코로나19가 터진 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들을 추려 이 책을 냈다. 코로나19 시대에 대한 사학자의 고찰과 성찰, 분석이 담긴 글들이다. 먼저 서양사학자로서 전염병이 세계사 흐름을 바꾼 사례부터 되짚는다. 19세기 유럽 전역에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국제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1865년 유럽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까지 콜레라가 번지자 프랑스 나폴레옹 3세는 ‘국제위생회의’를 소집했다. 저자는 “이 회의를 시작으로 각 국가가 세계적인 위기에 국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며 “20세기 들어선 유럽 강대국들이 전염병을 막으려 선박격리·국경폐쇄를 했고 이때 세계보건기구(WHO)가 창설됐다”고 설명한다.
코로나19 사태에 맞서는 지금의 세계는 어떨까. 저자는 “이미 각자도생의 시대가 됐다”고 진단한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초반 서구에선 협력 대신 동아시아인을 폄하하는 ‘오리엔탈리즘’이 대두됐다”며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되자 서구 사회는 허둥댔다. 확산 초반 코로나19를 ‘아시아 질병’으로 여기는 선입견이 작동해 공공 방역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미국, 영국 등 서구 사회가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한 이유는 뭘까. 저자는 사회적 긴장이 높아진 데서 원인을 찾았다. 그는 마크 해리슨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이론을 인용한다. 사회에 긴장이 누적된 시점에 전염병이 퍼지면 긴장이 폭발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극화와 인종차별로 높아진 긴장이 폭발하자 서구 사회는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고 여기에 개인주의를 내세우는 문화도 한몫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동아시아 국가가 펼친 방역체계가 무조건적으로 옳은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가가 주도해 개인을 감시하며 공공 정책을 펴는 것도 장기적으론 문제다.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 코로나19로 국가와 개인, 서구와 아시아 등 한동안 잊힌 갈등을 되짚어볼 시점이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