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의료기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누구나 쉽게 안경을 맞춘다. 반면 보청기는 정부 규제를 따라야 하는 의료기다. 그만큼 공급이 제한되고 가격은 비싸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보청기보다 저렴하고 성능은 우수한 정보기술(IT) 기반의 청각 보조장치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보청기 업체들이 저항하지만 대세는 이미 바뀌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난해 미국에서는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곧 다가올 미래가 보인다(Seeing Around Conners)》(2019)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시장 변화를 경영자가 어떻게 인지하고 대응할지를 새로운 각도에서 분석해 주목받았다. 2003년 일군의 시민들이 미 식품의약국(FDA)에 청원을 낸 뒤, 긴 논쟁 끝에 2017년 보청기 규제가 대폭 완화됐다. ‘변곡점(inflection point)’이 온 것이다.
대다수가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삼성전자가 2010년께 미래 헬스케어 전략 사업의 하나로 보청기를 선정했을 때 모두들 의아해했다. 음향기기 업체 보스는 오래전부터 보청기 규제를 피해 개인음향증폭기기(PSAP)라는 명칭으로 사업을 해 왔다. 그러다 2018년에야 비로소 보청기로 제품 승인을 받았다. 이후 애플은 물론 수많은 벤처기업이 시장에 앞다퉈 진출했다.
변곡점은 지나기 전까지는 잘 안 보인다. 심지어 징후가 뚜렷해도 거부하거나 무시한다. 일례로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 클리퍼드 스톨은 1995년 뉴스위크에 “웹(WWW)이 세상을 바꿀 것이란 주장은 멍청하기 그지없는 소리”라고 썼다. 정작 변곡점을 지나 온통 세상이 바뀌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누구에게나 당연한 현실이 돼 있다.
지금 떠오르는 블록체인, 빅데이터, 신재생에너지 등은 변곡점이 왔을까? 경영자는 고민할 것이다. 너무 일찍 시작했다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실패할 위험이 크고, 너무 늦게 들어가면 설 자리가 없는 딜레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산업(industry)’이 아니라 ‘아레나(arena·경합장)’ 중심으로 사고하고, 가치사슬 현장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라. 전자는 자동차 화장품 의류 등 사업을 물리적 특성으로 나누는 반면, 후자는 고객이 ‘하고자 하는 일(jobs to be done)’의 관점에서 구분한 것이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등등.
예를 들어 물리적 형태는 봉화, 편지, 전화기, 스마트폰으로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아레나는 언제나 ‘멀리 떨어진 상대와 의사소통하기’였다. 이제 경쟁자는 산업이 아니라 아레나 안에서 등장한다. 오늘날 소셜미디어가 금융의 경쟁자가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둘째, ‘발견이 이끄는(discovery-driven) 계획’을 실행하라. 흔히 경영자들은 변화 필요성을 느끼면 원대한 사명감과 절박함에서 한 판 개혁을 시도한다. 닷컴 열풍이 일던 2000년 BBC는 거액을 투자해 지멘스의 디지털 업무 시스템을 도입했다. 변화 필요성을 인지한 것까진 좋았으나 성급하게 구축한 시스템은 방송 고유의 업무 흐름에 안 맞아 파열음을 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리더는 일거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조직 내 아주 작은 지점에서부터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변화에 따른 일자리 불안에 노출된 임직원 심리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서 관찰되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피드백을 통해 변화 수준을 점차 높여가라는 얘기다. 디지털과는 거리가 먼 멕시코 시멘트회사 시멕스, 독일 철강기업 클뢰크너는 이런 방식으로 디지털 트렌드에 대응해 원가 절감과 시장 확대에 성공했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가 남긴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다. “봄이 오면 눈은 가장자리부터 녹는다.” 주변에 눈 녹는 것이 보일 때면 이미 늦다. 문제는 많은 경영자가 습관적으로 후행지표인 재무제표나 기껏해야 동행지표인 ERP(전사적자원관리)의 실시간 지표에 치중한다는 데 있다. 이것들은 언젠가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결코 알려주지 않는데도 말이다.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