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난 바보이고 싶다

입력 2020-08-09 18:21
수정 2020-08-10 00:18
지난 학기에는 모든 학교가 수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대면 교육이 불가능해지니 대부분 온라인 강의를 했다. 전 세계적인 재난 때문이기는 하지만 갑작스레 이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니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학습 평가를 위해 치른 온라인 시험에서는 집단과 개인 구별 없이 부정행위 문제가 대두됐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땐 두 명씩 짝이 돼 긴 책상을 함께 썼다. 거기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었으니 그 책상이 가장 중요한 학습 도구였다. 동물들처럼 자기 영역을 표시할 요량으로 책상 중간에 선명한 경계선을 긋기까지 했다. 집에서 야단이라도 맞고 온 날엔 괜한 심통을 부리며 친구의 팔이 그 선을 넘어오는 것을 기어이 나무랐다. 짝꿍과의 관계에 따라 엄청난 분단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따금 시험이라도 볼라치면 금을 그어 놓은 자리를 따라 가리개를 세워 서로 답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부정행위를 막는 매우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의 속성인 신뢰와 불신, 자율과 통제가 구분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도 중앙 분리대를 넘으려는 유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선생님이 친구와의 눈 마주침까지도 갈라놓으니 분단의 아픔은 더 커지기만 했다.

고등학교 교장이 돼 첫 시험을 준비할 때 일이다. 무감독 시험을 실시하겠다고 했더니 온통 난리가 났다.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모두 같은 편이 돼 안 된단다. 무슨 소리야?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무감독 시험을 시행하는 학교가 있었는데. 내가 부러워했던 일이니 우리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건방 떨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저 내가 잘못 갔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뒷말이 무성했다. 교장의 고해성사라도 듣기를 원했을까? 그래서 고백하기로 했다. 나도 선생님 몰래 책상 가운데 세워진 가리개를 넘어 친구 것을 보기도 하고 내 것을 보여주기도 했었다고. 후회됐지만 그 뒤로도 그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기억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 지금도 그 기억이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말도 덧붙였다. “힘들겠지만 서로 믿자. 그리고 서로 유혹받지 않도록 주의하자”며 당부를 마쳤다.

온라인 시험을 치른 대학생들 사이에서 “커닝 안 하면 바보”라는 말이 나왔단다.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학교의 미흡한 대응을 비판하려 한 것이었겠지만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그 말대로라면 커닝하고도 운 좋게 들키지 않은 나는 바보는 아니다. 그런데 생각날 때마다 후회되고 가슴 짠한 아픔은 어떻게 하나? 아직까지 후회하는 것을 보면 커닝은 좋은 게 아닌 모양이다. 좋은 일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정직하게 커닝 안 해 성적 나쁜 사람이 바보인가? 아니면 커닝해서 좋은 성적 얻고도 평생 후회하는 사람이 바보인가? 다시 돌아간다면 ‘난 바보이고 싶다.’ 어떤 바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