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8월04일(06:29)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당신이라면 달러 가치가 하락 중인데도 외국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 매입에 열광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우린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마이클 슈마허 미국 웰스파고증권 거시 전략 총괄이 지난달 29일 CN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를 비롯한 글로벌 거시경제 전문가 다수는 최근 금융시장에 새로운 위협의 부상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통화’ 달러의 위기입니다.
4일 뉴욕증권거래소(NYSE) 따르면 달러 지수(dollar index)는 전날 93.54로 전날보다 0.13포인트(0.15%) 반등했는데요. 최근 2018년 6월 이후 2년여 만에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계 주요 6개 통화 대비 상대적인 가치를 표시하는 이 지수는 7월 한 달 동안에만 5% 가까이 하락했습니다. 낙폭으로는 10년 만에 최대입니다. 달러 약세로 금값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직후 동반 급등했던 양대 ‘안전자산’ 사이에 뚜렷한 균열이 일고 있는 셈입니다.
달러 가치 하락이 두드러지자 비관론자들은 섬뜩한 경고를 내놓고 있습니다. 예일대 교수로 재직 중인 스티븐 로치 전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은 지난 6월부터 “달러 가치가 앞으로 2년에 걸쳐 주요 통화대비 35% 폭락할 것”이란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달러 가치 급락의 가장 큰 위험은 미 정부 지출의 원천인 국채 발행 부담을 키우는 일입니다. 지난달 31일 피치는 미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강등했습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에 이어 미국의 빚 상환능력 악화를 공표한 것입니다.
만약 슈마허의 전망처럼 정말 미 국채를 팔기 어려운 상황이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블랙스완’의 공포는 사실 지난 3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선언 직후 며칠 간 금융시장을 경악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10년 만기 미 국채 금리는 3월 12일 연 0.79%로 0.09%포인트 급락(채권값 상승)했다가 급격히 방향을 바꿔 같은 달 18일 연 1.19%까지 0.40%포인트나 급등(그래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트레이더들은 난생 처음으로 세계 최대 국채시장이 ‘마비’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을 숨죽여 지켜봤다고 전합니다. 글로벌 자본시장의 ‘주춧돌’이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은 미 정부와 중앙은행(Fed)의 전례없는 통화 공급 조치를 유발했고, 며칠이 지난 뒤에야 잦아들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달러 약세가 심해지면 이런 통화 팽창 정책조차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수입 물가 상승으로 미국의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압력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수출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달러 가치의 상대적 약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태도가 돌변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지난 5월 14일 “지금은 강한 달러(strong dollar)를 가져가기에 아주 좋은 시기”라며 코로나19와 전쟁 중 달러의 강세가 유지되길 희망하는 속내를 드러냈습니다.
달러 가치의 하락을 막으려면 재정지출 축소와 금리인상과 같은 긴축 정책을 써야 합니다. 코로나19 충격으로부터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 금융시장 관점에선 가장 두려운 조치입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락하던 달러 가치를 떠받치려는 미국의 긴축 정책은 1987년 10월 19일 역사상 최악의 주가 폭락 사태인 ‘블랙 먼데이’를 초래한 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지난달 31일 미 상무부는 미국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32.9%(전 분기 대비 연율 환산)를 나타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정부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1947년 이후 최악의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안전자산으로서 미 국채 가치는 아직까지 단단해 보입니다. 미 중앙은행(Fed)의 매수에 힘입어 10년물 기준 채권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금리는 지난 3월 연 1% 밑으로 내려온 뒤 최근 연 0.5%대까지 떨어졌습니다.
가계 저축 등 내부자본이 부족한 미 경제가 굴러가려면 국채를 외국에 팔아 재정적자를 메우는 작업을 지속해야 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조달러를 쏟아붓고도 건재했던 달러와 미 국채시장은 코로나19 이후에도 계속 ‘강한’ 면모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