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중절수술을 받으려 하자 가해자의 동의를 받아오라고 요구한 일본 병원들의 황당한 대처가 도마에 올랐다.
24일 일본 온라인 법조 전문 매체인 변호사닷컴에 따르면 '범죄 피해자 지원 변호사 포럼'은 일본의사회에 성폭력 피해여성의 임신 중절수술과 관련해 적절한 대응과 실태조사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발단은 서일본 경찰이 수사 중인 성폭행 사건. 피해 여성이 중절수술을 받기 위해 찾은 병원은 '친부' 즉 가해자의 동의를 요구했다. 가해자가 도주 중이기 때문에 동의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 여성은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이 여성의 사례가 보고된 후 전국 각지에서 "병원의 방침상 가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수술을 거부 당했다"는 피해사례가 줄을 이었다.
일본 여성보호법 제14조1항2호는 성폭행 피해여성의 중절수술을 인정하고 있다. 또 14조2항에는 "배우자를 알수 없거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본인의 동의 만으로 수술이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다. 상당수 병원은 이 조항을 근거로 성폭력에 의한 중절수술의 경우 상대의 동의가 불필요하다는 상식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병원들이 가해자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일본 산부인과의사회가 작성한 서면 동의서의 양식 때문이다. '범죄 피해자 지원 변호사 포럼'이 공개한 서면 동의서는 산모와 배우자의 인적사항을 자필로 기입하게 돼 있다. '범죄 피해자 지원 변호사 포럼'의 가미타니 사쿠라 변호사는 "산부인과의사회가 배포한 서면 양식의 배우자란을 비워두는데 불안함을 느낀 일부 병원들이 '배우자'를 '친부로 생각되는 인물'로 확대해석해 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병원 측은 소송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해명하고 있다. 임신을 지속할 경우 산모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이어서 산모의 동의 만으로 수술을 진행한 병원이 남편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위자료 50만엔(약 564만원)을 지급한 판례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산부인과가 "허위로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으니 수술해 달라는 산모의 말을 믿었다가 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가미타니 변호사는 이에 대해 "성폭력 가해자가 본인의 동의없이 피해자의 중절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병원에 소송을 건 사례는 없다"고 강조했다.
일부 병원들이 20년도 더 전에 정부로부터 받은 지침을 관성적으로 따르는 것도 성폭력 가해자의 동의를 요구하는 황당한 상황을 낳은 이유다. 1996년 9월25일 후생노동성은 "성폭력에 의한 임신이 아닌데도 중절수술을 원하는 일부 산모의 악용 가능성이 있으니 병원 측은 중절수술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지침을 전국 병원에 내렸다. 가미타니 변호사는 "강간 여부는 의사가 아니라 법원이 판단하는 것"이라며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피해자도 적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은 산모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