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트래블(travel)의 어원은 ‘travail’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고통, 고난과 그 기원을 함께한다. 여행이 고통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은 고생을 많이 한 여행이다. 오죽하면 여행을 ‘사서 고생’이라고 할까.
여행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 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여행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일 때는 좋다. 하지만 내게 여행 전야는 고된 과로에 닿아 있다. 비워둘 며칠을 위해 대개 그 전에 무리하게 일정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출발 전 마쳐야 할 일에 쫓기다 피곤에 지쳐 짐을 싸고, 허둥지둥 출발하다 보면 여행이 휴식인지 또 다른 잔업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밀린 원고와 노트북을 싸들고 떠났던 첫 번째 해외여행도 그랬다. 동행자는 스킨스쿠버를 하러 숙소를 비웠던 시간, 난 낯선 숙소 책상에 노트북을 두고, 어색한 의자에 앉아 마감이 급한 원고를 썼다. 반나절 넘게 비행기를 바꿔 타며 대서양까지 왔건만 대서양 바닷속 거북이의 모습은 동행자의 구술을 통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낯선 책상과 의자, 그것들이 놓인 공간의 새로움만으로도 그건 분명 여행이었다.
우리는 왜 일부러 낯설고 고통스러운 여행을 꿈꾸는 것일까? 재일 한국인 학자 강상중이 쓴 책 《도쿄 산책자》를 읽다 보면 실마리를 하나 얻게 된다. 강상중은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를 두고, 일상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매일 쓰던 이불과 베개, 늘 같은 향의 세제, 내가 선택한 샴푸와 비누 등이 아니라 타인의 공간에 던져지는 것, 이게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연출된 비일상성을 구매하기 위해 호텔로 간다.
계단을 걷다가 단차가 다른 칸을 밟았을 때 갑작스레 계단이 인식되듯이 어쩌면 여행이란 너무 익숙해 감지되지 않는 일상의 단차일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결별하는 것, 그러나 그 결별이 대개 안전한 귀환을 보장하기에 우리는 여행의 고통을 구매한다. 돌아와 익숙한 침구와 공간을 마주할 수 있기에 떠나는 고통이 여행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저 고통일 뿐이리라.
온라인, 언택트가 일상이 된 즈음 비일상의 구매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하루쯤은 전자기기를 다 버리고 뉴스도, 스마트폰도 없이 살아보는 게, 그게 더 여행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이 뛰어난 암체어 트래블러들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도 다른 삶을 그려내곤 한다. 그만큼 창의적이지 않더라도, 그렇게 꿈꾸는 것만으로도 삶은 조금 달라진다. 화면으로 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그리는 여행, 그게 여행의 첫 번째 단계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