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 가면 이제는 명물이 된 글판이 있다. 1991년 시작됐다니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겠다. 처음 시작할 때는 계몽적인 표어와 격언이 주를 이뤘지만, 강산이 바뀌니 글의 방향과 내용도 변했다. 우연히 오가다 만나는 글판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질 때도 있었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되짚어볼 기회를 얻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난날의 내 모습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고,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훨씬 많았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별처럼 아름답다.’
작년 가을 그 글판 자리를 채운 글귀로,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의 한 구절이다. 벌레 먹은 나뭇잎을 보며 벌레가 살아가도록 자기를 내어준 것이라 생각한 시인의 감성이 사뭇 놀랍다. 평생 교육에 종사한다면서 도대체 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줬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남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들면 ‘선생의 똥은 개도 안 먹는다’고 했을까? 요즘은 애완견을 반려견이라 부르며 귀하게 키우니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이 몰상식한 일이 될 법도 하다. 그러나 그저 ‘과연 나는 무엇을 주는 선생이었을까?’를 생각하다가 그 말이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선생과 관련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을 정도로 깊이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다. 또 한편으로는 스승도 인간적인 탐욕을 보일 수 있으니 선생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는 좇지 말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인데 스승의 날 행사를 하겠다는 제자들의 요청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교수님들이 물어왔다. 예전에는 스승의 날이면 으레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감사함을 표하는 행사를 하곤 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더니 그런 행사가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급기야 그날에 아예 문을 걸어 잠그는 학교도 생겨났다. 마침 학교가 모든 단체 활동과 모임의 자제를 권고한 상황이었기에 섭섭해도 행사를 하지 말도록 했다. 졸지에 감사의 마음을 나눌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서운한 생각이 들었을 교수님들을 위로할 길이 없었다. 그저 벌레 먹으라고 자기 몸을 내어준 이파리 같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을 뿐이다. 무엇이든 아낌없이 준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쉽겠나? 쉽지 않은 일을 하려니 개도 안 먹는 똥을 배설하는 유별난 사람이 된 것이라 위안하자. 벌레들의 먹잇감이 되느라 흉측해진 이파리가 금세 별이 돼 찬란히 빛나기를 바라지도 않았겠지.
광화문 글판의 시구가 자꾸 머리를 맴돈다. 그렇지. 남을 먹였다는 자랑도 없이 스러져간 나뭇잎 같았어야지. 좋은 것 더 많이 나눠주고, 못된 짓일랑 보여주지 말았어야지. 그랬더라면 야단법석인 우리 교육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