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와 동시에 피고소인(故 박원순 시장)에게 수사 상황이 전달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 시스템을 믿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
성추행 고소 사실을 알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무리한 박원순 시장에게 누가 피소 사실을 알렸는지가 미궁에 빠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13일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소 사실을 청와대에 알렸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행정부 각 부처는 중요한 사안을 대통령 비서실에 보고해야 한다"며 "이달 8일 박 시장에 대한 고소를 접수한 뒤 청와대에 이 사실을 알렸다"고 전했다.
경찰은 "피소 사실이 박 시장한테 전달된 경위는 알지 못한다"며 경찰이 서울시나 박 시장에게 직접 알려줬다는 일각의 의혹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경찰은 서울시와 직접적인 접점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의혹은 난센스"라며 "거물급 피의자의 경우 수사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 소환해야 할 때 당사자에게 피소 사실을 알린다"고 밝혔다.
청와대에만 이같은 경위를 보고했다는 경찰 주장에 청와대는 박 시장에게 피소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는 (박 시장에게) 관련 내용을 통보한 사실이 전혀 없다"면서 "'고 박원순 시장이 9일 새벽 청와대 통보로 피소 사실을 알게 됐다'는 언론 보도는 사실무근이다"라고 강조했다.
한 언론은 서울시 고위관계자를 인용, 박 시장이 지난 9일 새벽 청와대의 통보로 성추행 피소 사실을 알게 된 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잠적했다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고소인 측 변호인 등과 함께 박 시장의 영결식이 끝난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고소와 동시에 피고소인에게 수사 상황이 전달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누가 국가 시스템을 믿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소할 수 있겠나"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박 시장은 피소 하루 뒤인 지난 9일 연락이 두절됐고, 이튿날인 10일 0시 1분께 서울 북악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 시장의 성추행 혐의가 '기소권 종결'로 마무리되게 된 것은 박 시장이 출석 요구도 받기 전 자신의 피소사실을 접했기 때문이라는 정황이 드러나자 이 책임에 대한 공방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박 시장 비서 출신 A씨 측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으로 초대해서 피해자에게 지속적으로 음란한 문자를 전송했다"며 "속옷만 입은 사진을 전송하는 등 피해자를 성적으로 괴롭혀 왔다"고 폭로했다."처음 그때 소리지르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합니다.
저는 그저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다음은 성추행 피해를 주장한 비서 출신 A씨의 입장 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맞습니다. 처음 그때 저는 소리 질렀어야 하고 울부짖었어야 하고 신고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제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 홀로 많이 힘들고 아팠습니다. 더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꿉니다.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습니다.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제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도록 합니다. 진실의 왜곡과 추측이 난무한 세상을 향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저와 제 가족의 보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