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등거리 외교 성공비결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7-12 08:00

북한·중국·일본·미국 문제 등 모든 외교 정책에서 갈팡질팡하고, 민족의 운명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역사에서 효율적이고, 성공했던 나라의 외교정책은 현재 한민족에게 큰 지침이 될 수 있다.

고려는 산업과 무역을 바탕으로 경제력과 문화가 뛰어났으며, 국제적인 나라였다. 우리는 고려가 정치적인 위상과 역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모른다. 불가사의하다. 동아시아 지역 갈등과 고려고려 500년 동안에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요나라·송나라·서하·금나라·원나라(몽골)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면서 흥망을 거듭했다. 일본 또한 내부갈등으로 혼란이 끝없었다. 이렇게 복잡하고, 유동적이고, 전쟁으로 점철된 국제질서 속에서 고려를 성공시킨 외교정책의 실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현재 어떤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중국 지역이 통일되면 주변의 모든 나라는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내부갈등을 자제한다. 간섭과 복종, 지배를 추진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중국은 한민족의 분단, 통일, 경제문제, 심지어는 과거 역사까지 사사건건 간섭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는 중국의 분열을 원하고, 의도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분열을 조장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물론 조선 같은 예외도 있지만. 요나라와 송나라의 갈등과 고려의 등거리 외교 및 무역활동 고려의 외교정책을 중국 지역의 상황과 연관 지어 단계별로 살펴본다. 후삼국 시대에 중국지역은 남과 북에서 15개의 나라가 70여 년 동안 명멸하는 5대 10국이라는 대분열 시대(907년~ 979년)였다. 만약 당나라가 존속했다면 통일신라의 내정에 간섭했고, 고려는 통일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크다. 천운인지, 이후에도 중국은 40년 동안 분열이 계속됐다. 만주에서는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켰고, 947년에는 요나라를 건국하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만리장성 남쪽의 북경 등 지역)를 차지했다. 그러자 4대 광종은 패권국가의 진공 상황을 활용해 외세의 간섭없이 권력기반을 강화했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황제를 칭하면서 국위를 떨쳤다. 또한 요와 여진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협공할 계획까지 세웠다.

동아시아의 지정학적인 환경을 고려하면 만주지역의 통일국가와 중국은 대립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국가들은 이러한 역학관계와 변화상황에 예민했다. 마오쩌둥이 6.25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한민족의 영구분단이란 목표와 함께 만주를 완벽하게 중국질서로 편입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960년에 건국한 송나라는 치열한 통일전쟁을 벌이는 한편 대요 포위전선의 구축이 절박했다. 발해 유민들이 압록강 하류에 세운 정안국(938~986년)과 동맹(970년)을 맺고, 군사용 말을 수입할 정도였다.

요나라는 배후가 되는 고려를 우호세력으로 만들 필요 때문에 사신을 계속 파견해 국교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켰고 국경선을 접한 요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요나라를 배척할 수는 없었다. 반면에 송나라는 문화와 경제, 무역을 중시하는 국가였고, 황해로 인해 군사적인 충돌의 가능성은 적었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요나라에 대항해 송나라와 동맹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송나라는 고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고려와 요의 관계를 의심해 외교의 중단이라는 파국상태까지 이르렀다. 이 때 특사형식으로 바다를 건너가 송태조를 설득해서 7년 동안 단절된 외교관계를 복원시킨 인물이 젊은 서희(942~998년)다.

11세기 중엽에 들어와 송나라는 성장했고, 왕안석(1069~1076년)을 비롯한 자주적인 신파들은 요나라와 맺은 불평등 관계를 깨자는 주장을 했다. 한편 내몽골과 간쑤성 지역에서 일어난 서하(1038~1227년)는 송나라와 화전양면책을 구사하면서 강국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송나라는 1071년에 상인을 이용해 고려에게 국교를 맺을 것을 제안했다. 고려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곧 바로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자 송나라는 1083년에 고려의 문종이 죽자 조위사절단을 파견해 요나라를 공동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 고려를 우대해 한 때는 고려 사신을 서하(西夏)사신 보다 위에 뒀고, 요의 사신과 동등하게 대했다. 1014년에 등주에 첫 고려관을 설치한 후 1078년에는 저장성에서 바다로 나가는 출구인 진해시에 고려사신을 맞이하는 영빈관을 지었다. 1084년에도 청도만의 밀주(판교진)에 고려정을 건립했고, 훗날 반고려파인 소동파는 이로 인해 밀주와 해주가 시끄러웠다고 시를 지을 정도였다. 1117년에도 명주(닝보우)에 고려사관을 설치했다.

이처럼 11세기 후반에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놓고 치열한 외교전과 군사전을 펼쳤다. 고려와 북방의 요나라, 중국 지역의 송나라, 몽골 지역의 서하를 주축으로, 만주 일대의 여진, 일본 등의 주변 세력들이 이합집산했다.
고려는 송과 요나라의 갈등을 적절하게 활용해 철저한 등거리 외교를 실시하면서 다양한 이익을 챙겼다. 북송 시대인 약 160여 년 동안에 고려는 송에 57번, 송은 고려에 30번의 사신을 보냈다. 평균 2년에 1번 꼴로 이뤄진 밀접한 외교였다. 대문장가인 소동파는 황제에게 고려를 경계하고, 고려사신들을 들이지 말라고 강한 어조로 상소했다. 심지어는 고려 사신들이 군사적 허실을 살피므로, 잠재적인 위협을 끼친다고 적대국처럼 표현했다. (윤명철, 《한국해양사》)송나라와 금나라의 충돌과 고려의 등거리 외교
12세기에 들어오면서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또 다시 대변화가 발생했다. 만주에서 성장한 여진족이 요나라를 1125년에 멸망시켰고, 1126년에는 금나라를 건국한 후에 수도를 남쪽의 임안(항주)으로 옮긴 남송과 전쟁 상황에 돌입했다. 고려로서는 또 다시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1127년에 송나라에서 고종이 즉위하자 고려는 김부식 등을 축하사절로 파견했지만, 끝내 수도까지 갈수 없었다. 고려 사신들이 자국을 정탐해 금나라에 정보를 줄까봐 의심한 탓이다. 다음해인 1128년에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공동 군사작전을 재차 요구했으나 고려의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귀국했다. 그러자 조정은 매우 격노했고, 바다를 건너 고려를 정벌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이후 송나라는 고려 사신단을 금나라의 간첩으로 의심하여 몇 년 동안 방문을 중지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끝까지 송과 금나라의 충돌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등거리 외교로 평화와 이익을 챙겼다. 고려는 일본과도 교섭을 벌여 통일한 직후인 937년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냈으나 교섭은 활발하지 않았다. 12세기 후반부터 무신정치가 시작되면서 전쟁 등의 갈등 때문에 고려에게는 위협적이지 못했으며, 국제적으로도 전략적인 가치가 약했다. 다만 유구국(오키나와)은 무역 상대로서 가치가 있었다.

고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양을 중시하며, 무역정책을 권장해 경제적으로 성공한 송나라를 활용해 산업과 상업을 발달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무역망에 진입해서 국부를 증대시켰고, 세계질서에 눈을 떴다. 특히 유학을 비롯해서 문인화와 시·도자기 등의 예술, 불교 등을 수입해서 문화를 성숙시키는데 활용했다. 하지만 송나라의 지나친 문치주의는 훗날 고려사회가 약화되고, 멸망하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 잔재는 오랫동안 한민족의 세계관과 외교정책의 기조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외교정책이 주는 의미
고려는 정경분리 정책을 기조로 삼아 복잡하고 가변적인 역학관계를 조정하며 실리적인 등거리 외교를 펼쳐 성공했다. 이것은 국제질서의 실상을 파악하는 현실적인 사고와 국제적인 세계관, 그리고 해양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정치적으로 교류하며, 부상하는 몽골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요나라·서하·금나라 등을 활용해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이나 티베트 등과 무역을 활성화시키면서 정치와 외교의 다변화를 꾀했다면 더 성공했을 확률이 높다. 결국 13세기 전반에 원나라가 중국 전체를 포함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관장하면서 고려는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던져본다. 남·북한의 적대관계와 강력한 통일중국의 급팽창, 재부상에 성공하는 일본, 미·중 간의 심각한 갈등, 정체성의 상실. 이렇게 위기로 가득 찬 불확실한 상황을 극복하려면 고려의 외교정책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