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보다 기회라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1일 만난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 지오엘리먼트의 김대현 부사장은 1년 전 일본의 수출규제 뉴스를 접했을 당시 느낌을 이같이 회상했다. 모두가 위기라고 말했지만 기회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소재업체 켐이의 김세훈 수석연구위원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 기업에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고순도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폴리이미드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3대 소재의 한국 수출규제를 강화한 지 만 1년.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제조 관련 중소기업의 연구개발(R&D) 담당자들은 희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을 제소하는 등 원상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국내 소부장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도 펴고 있다. 특별법을 마련하고 올해 2조원 넘는 특별회계를 편성했다.
30년가량 국내 관련 산업에 몸담아온 김 부사장은 “과거에도 정부에서 수차례 ‘소부장 국산화’를 외치며 R&D 등을 지원했지만 산업 경쟁력은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며 “하지만 이번엔 다른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국내 대기업들이 오랜 기간 납품받아온 외국 업체 대신 국산 소재·부품·장비를 썼다가 문제가 생기면 교체를 추진한 엔지니어들이 줄줄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회고했다. 김 부사장은 “국내 소부장 기업은 국내 대기업에 공급할 기회가 많지 않고 이 때문에 오류를 잡고 품질을 높여나가는 노하우를 쌓을 수 없어 다시 국내 대기업에서 외면받는 악순환이 이어져왔다”고 설명했다.
일본 수출규제는 국내 대기업이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국내 업체의 소재·부품·장비를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0년 전 해외 장비 및 소재 수입에 부담을 느낀 반도체 대기업들이 국내에서 활로를 개척한 것이 소부장산업 발전에 큰 보탬이 됐다”며 “이번엔 그 이상의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
2015년 설립된 벤처기업 켐이는 지난해 9월 소부장 관련 정부 R&D 지원사업에 선정돼 한 디스플레이 대기업과 OLED 발광체를 개발하고 있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우리 같은 벤처기업이 대기업과 협업할 기회를 얻는 건 쉽지 않다”며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로 공급 안정화가 중시되면서 업계 분위기가 달라진 걸 체감한다”고 했다.
다만 이 같은 변화가 유의미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정부가 ‘축적의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정부가 밀어주는 R&D 과제는 보통 3~4년 안에 끝나고 특정 분야의 과제가 마무리되면 한동안 그 분야에선 지원사업이 없다”며 “특정 분야가 지금은 조금 뒤처져 있더라도 업데이트를 지속해야 다음 라운드라도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소부장에 대한 정부 지원은 한동안 이어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업체를 따라잡는 것 못지않게 중국 등 후발주자들과의 기술 격차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김 수석연구위원은 “한국의 OLED 기술력이 3~5년 내 중국에 따라잡힐지 모른다는 업계의 우려가 많다”며 “경쟁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리고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뼈대가 되는 소부장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