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 국무총리(사진)가 의원입법에 대한 자체적인 규제심사제도를 도입할 것을 21대 국회에 요청했다. 정부입법과 달리 규제심사 없이 진행되는 의원입법이 불필요한 규제의 주요 발원지로 지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의원입법을 지금처럼 방치해두면 한국만 세계적인 규제 완화 추세에 역행하게 되고 결국 4차 산업혁명 흐름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게 정 총리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규제 완화 추세 거스르는 의원입법
정 총리는 29일 3차 추가경정예산안 심사와 관련한 국회 본회의 시정연설에서 “의원입법의 규제심사와 관련해 특별한 요청을 드리고자 한다”며 “입법활동에서 국회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규제혁신을 위해선 국회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여야 의원들이 21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에 대한 자체적인 규제심사제도가 반드시 도입될 수 있도록 뜻을 모아주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정 총리는 “세계 각국은 4차 산업혁명 흐름에 발맞춰 기업의 창의성과 경쟁력을 진작시키기 위해 강력한 규제개혁을 펼치고 있다”며 “입법 과정에서 규제에 따른 경제·사회적 영향이 충실히 검토될 수 있도록 규제 영향분석 등 규제 관리를 강화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취임 직후 도입한 ‘투 포 원(Two for One)’ 규정을 주요 사례로 들었다. 기업들의 기술 및 서비스 개발을 독려하기 위해 규제 한 개를 신설하면 기존 규제 두 개를 없애도록 한 규정이다.
정 총리는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경제단체와 기업들은 신산업 창출과 혁신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과감하게 혁파해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며 “정부도 규제 혁신에 총력을 기울여 나가겠지만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국회가 도와달라”고 촉구했다.
“의원입법이 규제 주범”
한국에서 의원입법은 규제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다. 전체 법안 발의의 90% 안팎을 차지하면서도 규제심사는 받지 않은 채 각종 규제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7년 ‘한국 규제개혁보고서’에서 “의원입법에 대해 규제 영향을 분석하고 입법 단계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준과 요건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정부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0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법안 2만1594건 가운데 18.2%인 3924건이 규제 법률이었다. 5개 중 1개꼴이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한 지난달 30일부터 이날 오후 3시까지 발의된 법안 1079건 중 97.0%인 1047건이 의원입법이었다. 이번 국회에서도 규제 법안이 다수 눈에 띄었다. 기업 지배구조 관련 규제 법안인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대형마트를 규제하는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 ‘중소유통업 보호 및 육성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이자제한법 개정안, 보험업법 개정안 등이 모두 의원입법으로 발의됐다.
이 때문에 미래통합당도 지난 4·15 총선 과정에서 의원입법의 규제 영향분석을 공약으로 내놓기도 했다. 국회법을 개정해 의원입법에 대해서도 규제 타당성 절차를 마련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더불어민주당만 협조한다면 여야 합의로 21대 국회에서 의원입법에 대한 규제심사 도입이 가능하다. 다만 민주당 관계자는 “규제심사 도입은 법안 발의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어 깊이 있게 논의해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의원입법에 규제심사를 도입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무분별한 의원입법을 줄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는 법안 발의 건수가 의원들의 주요 실적처럼 평가되고 있다”며 “발의 건수보다는 법안의 질을 평가하는 시스템과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임도원/강영연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