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인력 많은 택배 '긱 이코노미 노동자' 리키…"하루 14시간씩 일하다 보면 결국 '노예'가 되는 거야"

입력 2020-06-29 09:00

기회비용에 밀린 가족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 택배기사 리키(크리스 히친 분)가 일을 늘리며 순항하는 것 같았던 리키네 가족. 갈등은 사춘기에 들어선 고등학생 아들로부터 시작된다. 길거리에 불법 낙서를 하고, 가게에서 물감을 훔쳐 골치를 썩인다. 일에 쫓겨 더 이상 관심을 주지 못하는 아빠 리키를 향한 삐뚤어진 외침 같아 보이기도 한다. 리키는 아들을 붙잡고 설득한다. “공부해서 대학엘 가야지. 매일 14시간씩 일하다 보면 결국 노예가 되는 거야.” 자신에 비유하는 듯한 리키의 말에 아들은 맞받는다. “아빠가 선택한 거잖아. 주어진 게 아니라 아빠 스스로 된 거야.”

문제는 아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수습하느라 일조차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기회비용’은 어떤 선택을 위해 포기한 모든 것을 뜻한다. 만약 아들의 사고를 수습하는 데 반나절을 썼다면 반나절 동안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반나절 보수가 5만원, 대체 기사 비용에 대한 부담이 5만원이라면, 반나절 휴가의 기회비용은 총 10만원이 된다. 부재 시 바로 인력이 대체되는 플랫폼 시장에선 기회비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200파운드(약 30만원)의 기회비용을 감수하고 사고를 친 아들을 경찰서에서 데려온 날, 리키는 소리를 지른다. “오늘 얼마 날린 줄 알아? 대체 기사 100파운드(약 15만원)에 하루 공치고 벌점까지!” 그날 아들은 집을 뛰쳐나간다. 리키의 승합차 열쇠도 함께 사라진다. 리키는 아들의 짓임을 직감하고 분노한다.

리키는 다시 출근하고…

아들이 집을 나간 뒤 밖을 서성거리던 리키는 중학생 딸의 전화를 받는다. 늘 사려 깊게 리키를 배려해왔던 막내딸이다. 딸은 울면서 고백한다. “차 열쇠를 숨긴 것은 오빠가 아니라 나야. 열쇠를 숨기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리키와 요양보호사인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가 모두 일거리를 늘리면서 얼굴조차 보기 힘들어지자 가족의 품이 그리워진 딸이 아빠의 출근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리키는 다시 일하러 간다. 택배 강도에게 물건을 빼앗기고 폭행 당한 채 돌아온 다음날에도 잔뜩 부은 눈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아들은 차 앞을 막아서며 외친다. “맞아서 한쪽 눈이 안 보이잖아. 운전하면 안 돼.” 하지만 리키는 무작정 차에 시동을 건다. 리키 앞에 놓인 길은 가족을 위한 길일까, 아니면 가족을 잃는 길일까. 리키의 승합차는 휘청거리면서 그래도 앞으로 나아간다.

플랫폼 노동자 규모도 파악 못하는 한국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미안해요 우리가 당신을 놓쳤네요)’다. 수령인이 부재중일 때 택배기사가 남기는 메모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리키가 택배기사이기도 하지만, 리키로 대표되는 플랫폼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정리되지 못한 채 제도권 밖에 머무르는 현실을 은유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 노동자를 기존 노동시장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다간 자칫 이들의 존재 자체를 놓칠 수도 있다는 중의적 의미다.

맥킨지에 따르면 2025년 ‘긱 이코노미’가 창출할 부가가치는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2%에 해당하는 2조7000억달러(약 3198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에서 5억4000만 명 정도가 플랫폼 노동자로 활동하고, 미국 노동인구의 18.5%, 영국은 16.1%가 긱 이코노미에 참여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선 플랫폼 노동자 규모조차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특수고용직보다 계약 종속성이 약하고 자영업자의 특성이 강한 이들을 따로 분류했는데, 전체 취업자의 2%에 해당하는 55만 명으로 추산됐다는 결과 정도가 나와 있을 뿐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기존 노동 통계는 임금 근로자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에 플랫폼 노동자 규모를 알 수 있는 공식 통계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제도가 노동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법적 지위 ‘논란’

이미 해외에선 플랫폼 노동자의 모호한 법적 지위를 둘러싸고 ‘입법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회를 통과해 올해 1월부터 시행된 AB5법이다. 독립 계약자도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회사에 고용된 직원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법에 따르면 차량 공유 플랫폼인 우버의 기사들은 직원 대우를 받아야 한다. 최근 한국 입법조사처는 “AB5법을 참고해 국내에서도 플랫폼 노동 입법을 검토해 도입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반면 지나친 규제가 혁신을 막고 일자리를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AB5법이 캘리포니아에서 시행된 지 두 달 만에 개정을 요구하는 법안이 34개나 쏟아졌다. 대부분이 특정 업종을 AB5 적용에서 제외시키는 내용이다. 우버는 캘리포니아주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벌이고 있다.

고은이 한국경제신문 기자 koko@hankyung.com

NIE 포인트

① 긱(gig) 이코노미에 저숙련 노동자뿐 아니라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일정 시간만 일하고자 하는 프리랜서, 은퇴자, 전업주부, 본업 외에 부업을 찾는 이 등이 참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② 기업들이 계약을 꺼려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음에도 플랫폼산업 종사자를 독립적 사업자가 아닌 임금근로자로 규정하고 보호해야 할까.
③ 플랫폼산업으로 주목받은 차량공유서비스 우버가 국내에서 기존 택시회사와 기사들의 반대로 불법화된 것은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일까, 아니면 혁신을 가로막는 지나친 규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