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증착공정에 필요한 레이저 장비를 같이 만들어 봅시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필요한 레이저 장비 업체인 이오테크닉스의 성규동 대표는 2011년 9월의 일이 생생하다. 삼성전자가 그때까지만 해도 100% 수입에 의존하던 반도체 증착공정 장비를 함께 개발해 보자고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다. 증착공정은 반도체 웨이퍼에 분자 또는 원자 단위의 박막을 입히는 반도체 전(前)공정 중 하나다. 국내 업체들이 다수 진출한 후(後)공정 장비 시장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았다. 성 대표는 “중소기업이 자체적으로 반도체 장비를 개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라며 “삼성전자가 먼저 손을 내민 덕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만 잘하는 것으론 부족하다”
두 회사의 공동개발 프로젝트는 최근 결실을 맺었다. 협업을 시작한 지 8년여 만이다. 이오테크닉스와 삼성전자의 엔지니어들로 구성된 협의체는 그동안 매주 모임을 열어 기술적 난제를 하나씩 풀어냈다. 이번에 개발한 장비는 삼성전자가 지난해 하반기 양산을 시작한 3세대 10나노급 D램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고출력 레이저를 이용해 웨이퍼에 증착 물질을 고르게 퍼트리는 것이 핵심”이라며 “미세공정을 통해 생산할 차세대 D램의 불량률을 크게 낮출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25일 ‘K칩 시대’라는 새로운 비전을 내놨다. 국내 반도체 협력업체들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오테크닉스와 같은 상생과 협력이 전방위로 확산해야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오테크닉스 외에 삼성전자와의 협업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린 사례는 적지 않다. 3차원(3D) 낸드플래시 식각공정의 핵심 소재인 ‘고선택비인산’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반도체 소재업체 솔브레인, 반도체 식각공정의 효율화에 필요한 세라믹 파우더를 개발한 싸이노스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다음달부터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던 협력업체들과의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 수입에 의존하던 반도체 장비와 소재를 국산화하는 게 목표다. 반도체 제조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컨설팅 활동도 강화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미 24개 협력업체가 경영 자문을 요청해왔다”며 “개발, 제조뿐 아니라 인사, 마케팅, 정보보호 등 협력업체 경영 전반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인재’ 육성에도 역점
K칩 선언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주도해 내놓은 비전이다. 반도체산업의 위기에 대응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해 삼성이 주축이 되는 협력업체 지원 프로그램 마련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4월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세계 최고를 향한 도전을 멈추게 하지 않는 힘”이라고 말했다.
경제계에서는 K칩 선언을 일본의 수출규제 1년을 맞아 삼성이 내놓은 새로운 비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본에 다시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한국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삼성전자가 공을 들이는 분야는 메모리 반도체 생태계만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0월부터 정부와 함께 1000억원 규모의 ‘시스템 반도체 상생 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다. 유망한 팹리스(반도체 설계업체)와 디자인하우스(반도체 설계 후공정 업체)를 발굴해 지원하는 게 펀드를 만든 목적이다. 팹리스에 시스템 반도체를 손쉽게 설계할 수 있는 클라우드 기반 플랫폼도 제공한다.
산학협력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국책 반도체 특성화 대학인 한국폴리텍대엔 반도체 공정장비와 계층장비를 기증했다. 서울대와는 ‘인공지능반도체공학 연합전공’을 함께 개설했다. 학생들에게 삼성전자 인턴십에 참여할 기회를 주고 반도체 설계와 관련한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이 밖에 연세대, 성균관대 등에 반도체학과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미래 인재를 육성하고 있다.
지구환경 보호 차원의 상생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 말부터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주차타워에 1500㎾ 규모의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 오는 7월부터 기흥 일부 사무공간의 전력을 태양광 발전을 통해 공급할 예정이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