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기록한 미술작품…평화의 길을 묻다

입력 2020-06-24 16:55
수정 2020-06-25 03:47

‘고바우 영감’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성환(1932~2019)은 6·25전쟁 발발 후 피란을 가지 못해 서울 정릉 집의 다락방에 숨어지냈다. 경복고 학생이던 그는 자신이 목격한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날짜별로 일지를 쓰듯 스케치했다. 시신이 산산조각 나 널브러진 모습, 종로5가 길거리에 버려진 시신들, 개성을 폭격한 미군기, 헐렁한 군복을 입은 인민군 소년병…. 밀짚모자를 쓰고 그림 구석에 숨어서 살펴보는 사람은 작가 자신이다. 김 화백은 후에 국방부 정훈국 미술대에서 수많은 인물화와 기록화, 삽화를 그렸다. 전투가 치열했던 6사단 군인들의 얼굴을 그린 세밀화는 이름, 계급 등이 사진처럼 생생하다.

김 화백이 남긴 수많은 전쟁 기록화 가운데 80여 점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5일 오후 4시 유튜브 생중계로 온라인 개막하는 기획전 ‘낯선 전쟁’을 통해서다.

전시 제목 ‘낯선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과 분단, 통일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이가 커지면서 점차 6·25가 낯설고 잊힌 전쟁이 돼가고 있다는 의미다. 전쟁세대의 기억에 남아있는 6·25의 참상을 되새기고 인간답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염원하는 뜻을 전시에 담았다. 피란길에서 제작된 작품부터 시리아 난민을 다룬 동시대 작품까지 회화, 드로잉, 영상, 뉴미디어, 퍼포먼스 등 국내외 작가 50여 명의 작품 250여 점을 선보인다.

4부로 구성된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전쟁 당시의 기록을 다양하게 살펴보는 1부 ‘낯선 전쟁의 기억’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환기 권영우 우신출 윤중식 임호 김성환 등 많은 예술가가 종군화가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평양미술학교 출신인 윤중식은 가족과 떠난 피란길의 모습을 연작으로 남겼다. 그의 ‘피란길’ 연작은 평양에서 부산까지 피란길에서 겪은 사건들을 시간순으로 그린 작품이다. 어린 딸을 위해 젖동냥을 하려고 지나가는 아낙네들을 애타게 부르는 장면, 인민군에게 붙잡혀 가는 장면 등이 생생하다. 빠른 필치로 그린 드로잉 뒤에 있는 “언젠가 그림으로 그리고자 남겨둔다”는 메모는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서 그렸는지 짐작하게 한다.

러시아와 북한에서 활동한 변월룡은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담아냈다. 그의 에칭 작품 ‘6·25전쟁의 비극’은 발이 드러난 시체 옆에 앉아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는 여인과 무릎을 꿇고 앉은 아이의 실루엣을 담았다. ‘조선 분단의 비극’은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업은 채 울고 있는 여인과 절규하는 남자들의 아우성이 개인들에게 가해진 전쟁의 아픔을 상징한다.

저널리스트 존 리치와 맥스 데스퍼 AP통신 사진기자가 이방인의 관점에서 담은 한국인과 전쟁의 모습도 눈여겨볼 만하다. 호주의 이보르 헬레와 프랭크 노튼, 캐나다의 테드 주버가 전쟁 당시 제작한 작품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들여오지 못해 영상으로 공개한다.

2부 ‘전쟁과 함께 살다’는 휴전 후 분단체제가 낳은 비극을 조망한다. 서양화가 이동표(88)의 ‘1인2역 골육상잔’은 6·25전쟁 때 인민군과 국군으로 복무한 자신의 이야기다. 해주미술학교에서 공부하다 인민군에 입대한 그는 포로가 돼 미군 수송부대 초상화가를 거쳐 국군 부대에 입대했다.

시리아 이라크 등 세계 전쟁 난민과 대량살상용 무기 등을 통해 전쟁으로 잃어버린 것과 훼손된 가치를 짚어보는 3부,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지향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4부는 전시의 본래 취지를 제대로 살렸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특히 전후 분단체제를 ‘국가주의와 군대문화가 사회 전반에 작동하는 일종의 병영국가’로 규정하고, ‘일상에 내면화된 군사주의 극복’을 평화 실천의 당면 과제로 내세운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전시는 9월 20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