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공격 일상화"…상법개정 특수 준비하는 로펌

입력 2020-06-21 17:15
수정 2020-06-22 00:28

2006년 한국 주식시장은 ‘기업 사냥꾼’의 등장으로 떠들썩했다. 미국의 행동주의 투자자 칼 아이칸이 KT&G 주식에 대한 투자 차익 1500억원을 챙기고 떠나면서 ‘먹튀’ 논란이 일었다. 당시 아이칸은 헤지펀드와 손잡고 KT&G 주식 6.59%를 확보해 단숨에 3대 주주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집중투표제를 활용해 헤지펀드 측 사외이사 한 명을 KT&G 이사회에 진출시켰다. 이후 KT&G에 자회사인 한국인삼공사 매각과 부동산 처분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KT&G는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2조8000억원을 투입했다.

로펌업계에서는 앞으로는 제2의 아이칸 사태가 일상화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상법개정안 때문이다. 상법개정안에는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비롯해 이사·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3%룰 강화 등이 포함돼 있다. 이대로 법이 통과되면 지배구조가 취약한 한국 상장업체가 또다시 외국계 헤지펀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펌업계는 기업 자문 수요가 대폭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감사 분리 선출…“헤지펀드 침투 본격화”

로펌업계에서 상법개정안 중 가장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조항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 관련 규정이다. 상법개정안에는 감사위원 중 ‘1명 이상’을 이사 선출 단계에서부터 다른 이사와 분리해 별도로 선출하도록 하는 규정이 도입된다. 이 경우 최대주주는 특수관계인 등을 합산해 3%, 일반주주는 3%를 초과하는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3%룰이 적용된다. 감사위원이 대주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 조항을 통해 아이칸 같은 주주 행동주의자들의 ‘기업 침투’가 본격화될 수 있다고 본다. 김상곤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경영진에게 적대적인 이사 1명이 이사회에 들어와 다른 이사들을 상대로 배임 고소를 남발하거나 기업 경영을 방해할 수 있다”며 “주주총회에서 잦은 대결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져 주주총회 자문 수요, 경영권과 관련된 각종 가처분 분쟁이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노석준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3%룰 적용으로 소액주주의 경영 간섭이 많아지면 최대주주 또는 경영진도 법률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어 로펌은 기업 자문 수요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중대표소송제로 소송 증가”

상법개정안의 주요 항목인 다중대표소송제 도입도 재계와 법률 서비스 시장에 파장을 일으킬 것이란 전망이다. 다중대표소송제는 자회사의 이사가 손해를 일으킨 경우 모회사의 주주도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대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소수 주주가 자회사 경영진을 상대로 대표소송을 제기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어날 것이란 게 로펌업계 전망이다.

김지평 김앤장 변호사는 “상장사 임원 외에 비상장 자회사 임원도 대표소송 대상이 된다”며 “상장사 및 계열사 임원의 의무 및 민형사상 책임이 커지므로 이에 대한 자문 수요가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앤장은 회사법 및 지배구조팀을 두고 김용상, 김지평 변호사 등 50여 명의 변호사와 외국변호사, 회계사 등을 배치해 전담 업무를 맡기고 있다.

과거의 거래 행위까지 다중대표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숙미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자회사의 기존 거래 행위와 관련해 손실이 생긴 사안을 중심으로 거래의 적정성 검토, 손실 회복 방안, 책임의 소멸 여부 등에 대한 선제적 자문이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종은 자문 및 송무 변호사 20여 명으로 구성된 주주·경영권분쟁팀이 주주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 전략 수립 등 다양한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법개정안에서 배당기준일 관련 규정을 탄력적으로 바꾸기로 한 것도 기업 환경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기존 법에는 직전 영업연도의 말일인 배당기준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주주총회를 열도록 규정하고 있어 기업들이 매년 3월 ‘주총대란’에 시달리고 있다.

이숭기 법무법인 화우 변호사는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경우 결산기 후 3개월 이내에 정기주총을 여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상법개정안이 시행된다면 재계에서는 정기주총 개최 시기와 관련한 정관을 개정하고, 별도의 배당기준일을 정해 정관에 반영할 텐데 이 과정에서 법률 자문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효주 기자 j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