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전시하며 '강제노역 없었다'…약속 깨뜨린 日

입력 2020-06-14 21:41
수정 2020-06-14 21:57


일본이 근대 산업유산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겠다는 약속을 깨뜨렸다. 오는 15일부터 일반에 공개되는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은 메이지시대 산업화 성과를 과시하는 내용 일색으로 일제 강점기 징용 피해자를 추모하는 내용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도쿄특파원 공동취재단은 일반 공개 하루 전인 14일 도쿄도 신주쿠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방문했다.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일반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는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지난 3월31일 개관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지금까지 휴관했다.

1천78㎡ 크기의 센터 입구에는 2015년 일본 메이지 산업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강제징용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는 사토 구니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의 발언이 소개돼 있다.

당시 사토 대사는 산업유산의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권고를 존중한다면서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노역했다"고 인정했다. 또 일본은 정보센터 설치를 비롯해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정부가 일본이 징용 피해자의 어두운 역사에 눈을 감고 있다는 이유로 메이지 산업유산 등재에 반대하자 정보센터를 설립해 희생자를 기리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정보센터에는 메이지시대 철강과 석탄 등의 분야에서 이룬 일본의 산업화 성과를 과시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의 대표적인 장소인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을 소개하면서 강제징용 피해 자체를 부정하는 증언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어린 시절을 군함도에서 보낸 재일교포 2세 스즈키 후미오 씨의 증언 동영상이 대표적이다.

스즈키 씨는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없었다"고 답했고, '조선인을 채찍을 때렸다는데 사실이냐'는 질문에도 "일을 시켜야 하는데 왜 때리겠냐. 그런 것 없었다"고 답했다. 스즈키 씨의 아버지는 군함도 탄광촌에서 '오장'(팀장급 관리자)으로 일했고, 그는 아버지의 경험에 기초해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군함도에서 일한 대만 사람이 "급여를 정확히 현금으로 받았다"고 증언하는 내용과 함께 월급 봉투도 전시돼 있다. 생존자의 증언을 활용해 군함도에서 '노예노동'이 없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없었으며, 월급도 제대로 지급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징용 관계 문서 읽기'라는 전시에서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징용 제도를 언급하고 있을 뿐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고 사토 대사가 인정한 사실이나 희생자를 기리는 내용은 없었다.

일제 강점기 메이지 산업유산 가운데 군함도를 비롯해 야하타 제철소, 나가사키 조선소, 다카시마와 미이케 탄광 등에는 한국인 3만3400명이 강제 동원됐다. 군함도에서는 1943∼1945년 500∼800명의 한국인이 강제 노역을 했고, 122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는 전시가 포함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일반에 공개함에 따라 한일 관계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우리 정부는 15일 산업유산정보센터 일반 공개에 맞춰 일본 정부의 '역사 도발'에 대한 외교적 조처를 할 것으로 보인다. 산업유산정보센터 국민회의라는 일반재단법인이 운영하나 일본 정부의 예산으로 설립됐다.

도쿄=정영효 특파원/임락근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