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제발 상장하지 말아달라”고 읍소하고, 거래소는 “많이 거래되면 좋은 일 아니냐”며 상장을 강행하고…. 주식시장이라면 일어날 수 없는 기괴한 일이 지금 국내 가상화폐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발단은 카카오의 블록체인 계열사 그라운드X가 만든 ‘클레이(Klay)’라는 이름의 가상화폐가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면서다.
카톡으로 뿌려진 ‘공짜 코인’
카카오는 지난 3일 카카오톡에 암호화폐 지갑 서비스 ‘클립’을 추가했다.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자산(가상화폐)을 간편하게 관리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기능이다. 카카오는 선착순으로 클립 가입자 10만 명에게 50클레이씩 공짜로 나눠주는 행사를 벌였는데 하루 만에 마감됐다. 클레이는 이용자가 그라운드X 제휴사의 다양한 블록체인 서비스에 참여하도록 유인하는 ‘보상 수단’의 하나였다.
그라운드X는 클레이를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에 상장할 계획이 없었다. 지난해 10월 업비트의 싱가포르·인도네시아 거래소에만 상장했다. ‘비트코인 광풍’ 이후 금융당국이 가상화폐에 부정적 시각을 고수해 온 점을 고려했다.
하지만 국내 가상화폐 거래소들이 최근 그라운드X의 동의 없이 클레이를 임의로 상장시키면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중하위권 거래소인 지닥과 데이빗에 이어 지난 5일부터는 국내 4대 거래소의 하나인 코인원까지 클레이 매매를 시작했다. 그라운드X는 “사전 협의 없는 일방적 결정”이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클레이가 사고팔릴 때마다 거래소는 수수료를 챙길 수 있다. 대형 거래소 관계자는 “가상화폐 상장은 개발사와의 협의하에 이뤄져 왔다”며 “개발사가 원치 않는 ‘도둑 상장’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가격 널뛰기 하는 클레이
가상화폐 시황분석 사이트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카카오톡에서 무상 배포가 시작된 3일 클레이 가격은 174원이었다. 5일 468원까지 치솟았다가 10일 200원대로 다시 급락했다. 공짜로 받은 클레이를 현금화하려는 ‘팔자’ 주문과 가격 상승을 기대한 ‘사자’ 주문이 뒤엉키면서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그라운드X는 클레이가 투기 수단으로 비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재선 그라운드X 대표는 “클립을 기획하며 가장 경계했던 것이 단기 시세 차익에 대한 관심으로 클립 서비스보다 클레이가 부각되는 것”이라고 했다. 시장이 과열될 경우 당국이 고강도 규제를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그라운드X는 지닥 등과 맺은 기술제휴 계약을 파기하는 등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인 상장을 막을 방법이 없다. 기술이 외부에 공개되는 ‘퍼블릭 블록체인’의 특성 때문이다. 코인원 측은 “개발사와 입장이 다른 것은 맞다”면서도 “블록체인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닥과 데이빗은 ‘거래수수료 면제’ 행사까지 시작했다. 이들 거래소는 상장을 철회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트코인 거품이 꺼진 이후 대부분 가상화폐 거래소는 경영난에 빠져 있다. 업계 관계자는 “카카오라는 유명 정보기술(IT) 기업의 코인이 대중의 관심을 받자 나타난 이상 과열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그라운드X가 블록체인의 본질을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한다는 반론도 있다.
임현우/최한종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