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읽으며 깨달은 베토벤 감정, 건반에 실어 들려줄게요"

입력 2020-06-10 17:15
수정 2020-06-11 03:21
“애써 준비한 독주회가 취소돼 물론 속상했죠. 많이 당황했지만 며칠 지나 ‘자유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즐기고자 했어요. 피아노 건반 대신 소설책을 손에 쥐었죠. 하하.”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문지영(25)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본의 아니게 휴식기를 맞은 심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그는 2014년 스위스 제네바 국제콩쿠르와 2015년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거의 쉼 없이 전 세계를 돌았다. 지난해에는 미국에서 리사이틀을 열었고,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독주회 데뷔도 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 4월 초 브람스 소나타 곡들로 준비한 서울 예술의전당 리사이틀이 취소됐다. 하늘길이 막히자 남미와 유럽 연주회도 모두 무산됐다. 이탈리아 부조니 콩쿠르 초청공연도 미뤄졌고 이탈리아 팔레르모에서 열리는 여름 클래식 축제에서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와 협연할 무대도 사라졌다. 지난 3개월 동안 김다미와 함께 연주한 무관중 온라인 콘서트를 제외하곤 공식 연주회가 없었다. 약 5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쉬는 시간’이었다.

“요즘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다시 읽고 있어요. 리사이틀이 취소되고 한동안 베토벤 연구에 매달렸어요. 그의 작품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어 악보만 봐서는 깊게 파고들 수 없었죠. 독일 작가가 쓴 ≪데미안≫ 안에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내며 작품 해석력을 길렀습니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연습할 때 책에서 인상깊게 읽은 문장이 떠올라요. 그걸 자연스레 건반으로 옮기죠.”

문지영은 다음달 정식 음악홀이 아니라 ‘작은 공간’에서 베토벤 작품을 연주한다. 더하우스콘서트가 다음달 서울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여는 음악축제 ‘줄라이 페스티벌’에 대표 주자로 나선다. 연주 장소인 ‘예술가의 집’은 객석과 무대 구분이 없다. 평평한 마룻바닥에서 관객은 연주자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공연장에는 보통 150명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이번 축제에선 ‘거리두기’를 위해 관객을 50명만 받는다. 문지영은 다음달 22일 피아니스트 박영성과 함께 두 대의 피아노곡으로 편곡한 베토벤의 교향곡 6번을 연주하고, 다음날에는 첼리스트 김민지와 함께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1번을 협연한다. 31일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릴레이 연주’에선 가장 먼저 1번을 연주한다.

관객들은 가볍게 즐기는 살롱 콘서트지만 연주자는 생각이 달랐다. “피아니스트들에게 베토벤의 작품은 ‘거대한 장벽’입니다. 작곡가가 전하려 한 메시지를 읽기가 쉽지 않아요. 철학적이고 감정폭도 깊죠. ≪데미안≫ 독서뿐 아니라 앞서 슈만과 브람스 등 독일 낭만파 작곡가들을 연구한 게 도움이 될 거 같아요.”

문지영은 이번 베토벤 음악축제가 끝난 뒤에는 다시 브람스 작품을 파고들고 싶다고 했다. “보통 한 작곡가의 작품을 깊이 파고들곤 하는데요. 브람스 작품은 악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브람스를 다루고 싶습니다.”

글=오현우/사진=김범준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