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하고 말리고 입히고…시간을 쌓아 色을 만들다

입력 2020-06-09 18:01
수정 2020-06-10 00:38

회화와 조형, 공예, 사진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허명욱 작가(54)의 하루는 색을 만드는 일로 시작된다. 그날의 감정을 담아 직접 색을 배합해 자신만의 색을 만든다. 그는 이렇게 만든 ‘그날의 색’을 날마다 기록하고 강판, 캔버스, 나무막대(스틱) 등 다양한 바탕에 칠한다.

그의 작품은 이런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 완성된다. 강판을 본체로 한 작업의 경우, 강판 위에 옻칠을 한 뒤 고온경화를 위해 여러 차례 오븐에서 굽는다. 이렇게 초벌이 된 본체 위에 색을 입히는 바탕 작업이 두세 달에 걸쳐 이뤄지고, 건조 과정을 거친 뒤 색칠하기와 말리기를 반복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몇 달에서 몇 년씩 걸리는 이유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1·2관에서 열리는 허 작가의 개인전 ‘칠하다’에 걸린 작품들은 시간과 색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우는 가로·세로 3m씩의 대작을 비롯한 평면 작품 25점과 조형작품 2점 등 27점을 내놓았다. 작품 제목은 모두 ‘Untitled(무제)’로 붙였다.

허 작가의 작업은 크게 네 가지의 연작으로 분류된다. 강판 위에 옻칠을 접목한 작업, 매일의 색을 기록한 나무막대를 하나로 모은 스틱 작업, 캔버스 천을 중첩하는 작업, 드로잉 기법을 활용한 작업 등이다. 어떤 방식의 작업이든 시간의 축적, 색의 반복적 쌓기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출품작 중 가로·세로 3m씩의 대작은 패브릭을 20겹이나 쌓은 작품이다. 철심을 격자무늬로 깔고 그 위에 얇은 캔버스(천)를 편 다음 생칠(생옻)과 찹쌀풀을 섞은 호칠을 해 붙이고 말린다. 여기에 다시 토분과 생칠을 섞어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7~8회 반복한다. 천연 생칠만 70~80회를 반복하며 1년여가 걸린 끝에 작품이 완성됐다.

가로 710㎝, 세로 61㎝의 스틱 작품은 그날의 색을 좁고 얇은 스틱 단면에 칠한 것을 모은 것이다. 스틱에 색을 칠하고 말리는 데 평균 8일이 걸린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4년 가까이 걸렸다고 한다.

옻칠과 호칠, 색칠로 색과 캔버스를 쌓는 그의 작업이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그날의 색’을 쌓은 뒤 마지막에 색을 칠해 덮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는 “색을 쌓는 것은 캔버스를 중첩해 단단하게 하고 질감을 더하는 물리적 효과 외에 좋은 기운을 화판에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했다. 색을 쌓는 것은 좋은 기운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이라는 얘기다.

시간을 쌓아야 하는 그의 작업에서 효율을 올리는 방법은 딱 한 가지. 작업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그래야 동시에 여러 작품을 제작할 수 있어서다. 현재 7개의 작업실에서 최대 40점가량을 동시에 만드는 허 작가는 “옻칠 작업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하 작업공간을 또 마련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과 색을 쌓는 그의 작업은 더 넓게, 오래 지속될 모양이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