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밸리는 '인재 블랙홀'…4대 그룹도 떨고 있다

입력 2020-06-07 17:32
수정 2020-10-08 18:28

정보기술(IT)업계가 제조회사들의 우수 인력을 무섭게 빨아들이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한 대기업 인력은 물론 대형 시중은행 핵심 인재들마저 IT회사로 발길을 돌리면서 제조·금융업체들은 인력 지키기에 비상이 걸렸다.

7일 산업계 등에 따르면 네이버의 금융자회사 네이버파이낸셜은 지난달 15일부터 한 달간 경력직원을 공개채용했다. 50명 이상을 뽑는 네이버파이낸셜의 경력 공채엔 수백 명이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원자 중에는 금융권뿐만 아니라 4대 그룹 등 대기업 인력도 대거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분석 등 소프트웨어 분야 경력자가 예상외로 많이 몰리면서 서둘러 채용공고를 내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해 말부터 본격화했다고 IT업계는 분석했다. KB금융그룹은 카카오와 합작해 인터넷은행(카카오뱅크)을 설립하기 위해 2016년 직원 15명을 보냈다. 이들은 거취를 정해야 하는 지난해 말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카카오뱅크에서 근무 중이다. 우리금융그룹에서 케이뱅크로 파견간 직원의 3분의 1도 케이뱅크에 잔류하기로 했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계약 조건마다 다르겠지만, 연봉은 인터넷은행이 더 적은 것으로 안다”며 “은행이라는 안정적인 고연봉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간 직원이 많아 금융업계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제조·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제조업과 금융업도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필요한데 이들의 IT행(行)을 막을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다.

한 대기업 CEO는 “많은 비용을 들여 교육을 시킨 직원이 IT업계로 이직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은 회사 이름을 바꾸고 스마트오피스를 만들며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제조업 기반의 한 대기업 CEO는 “한국은 해외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며 수출을 통해 국부를 늘려야 굴러갈 수 있다”며 “편안함을 좇는 젊은 세태에 대한 실망감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사업보국의 책임감이 약해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젊은 직장인 '워라밸' 찾아 대거 판교로…대기업은 인력 이탈 '비상'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그룹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고 있는데, 어렵게 키운 직원들이 떠나버려 속상합니다.”

국내 한 제조업 기반 그룹의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정보기술(IT) 인력 지키기에 비상이 걸렸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어렵게 일을 가르쳐 현업에 투입할 만하면 네이버나 카카오로 떠나간다”며 “딱히 잡을 방법이 없어 답답한 마음”이라고 하소연했다.

대기업 “IT 인력 유출 막아라” 비상

7일 산업계에 따르면 네이버와 카카오로 대표되는 IT회사들이 최근 제조업과 금융업의 핵심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다. 제조·금융회사들의 인사팀은 핵심 인력을 데려오거나 가르치는 게 아니라 ‘지키는 일’이 주업무라는 설명이다.

카카오는 2016년, 네이버는 2017년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집단으로 지정된 뒤에도 카카오톡과 국민 포털인 네이버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각종 신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네이버는 지난해 11월 네이버파이낸셜을 설립하며 금융업에 본격 진출했다. 카카오 계열사는 92개로 SK(121개) 다음으로 계열사가 많은 그룹이 됐다.

직원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자회사를 포함한 네이버의 직원 수는 2017년 8100명 수준에서 지난해 말 1만5200여 명으로 두 배 가까이로 불었다. 카카오 직원 수도 같은 기간 5800여 명에서 8600여 명으로 늘었다. 대부분 삼성·현대차·LG·SK 등 제조업 기반 그룹과 KB·우리·신한 등 금융그룹의 엔지니어, 기획 부문 출신이다.

IT업계 관계자는 “네이버는 온라인 상거래 사업을 강화해 한국의 아마존으로 도약 중이고, 카카오는 택시회사를 잇따라 인수하면서 국내 최대 모빌리티 업체가 됐다”며 “이들이 필요로 하는 인력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워라밸’과 고연봉이 무기

제조업과 금융회사에서 일하던 인력이 네이버와 카카오로 이직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이 조금 더 편하고 고연봉이 보장된 데다 향후 이직 기회도 열려 있다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각 기업의 인사팀과 이직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최근 금융권에서 카카오로 이직한 한 직원은 “전 직장에 비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보장되고 카카오에서 일하다 보면 향후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기회도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조업 경영자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며 하소연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편한 일만 찾아다니는 세태에 실망했다”거나 “네이버나 카카오는 국내 시장을 파먹고 사는 기업에 불과하다” 등의 불만이 대표적이다. “워라밸만 찾으면 사업보국 같은 경영이념은 누가 실현하느냐”는 목소리도 있다.

수출 제조회사와 금융회사는 핵심 인력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 제조 기반의 대기업 인사팀장은 “엔지니어뿐 아니라 디자인 기획 인력이 네이버나 카카오 및 그 자회사로 빠져나가는 걸 막는 게 어느새 주업무가 됐다”고 토로했다.

IT업계보다 연봉이 낮은 일부 대기업은 인력을 지키기 위해선 임금구조 전반을 손봐야 한다. 하지만 이들 전통기업은 호봉제를 기반으로 해 핵심인력에게만 임금을 높여줄 수 있는 기준이 없다. 이를 해결하려면 노조와 협의해야 하는데 이 역시 쉽지 않다.

사명 교체에 모바일 오피스까지 ‘안간힘’

이렇다 보니 사명을 바꾸고 업무환경을 개선하는 차원에서만 대응에 나서고 있다. LS산전은 최근 LS일렉트릭으로, 한국타이어그룹은 한국테크놀로지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회사 관계자들은 “회사 이름을 좀 더 세련되게 해서 눈길을 끌고, 미래 성장동력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하자는 차원에서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핵심 인력을 지키고 장기적으론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IT산업의 ‘메카’로 불리는 판교로 달려가는 전통 제조기업도 나오고 있다. 타이어 제조사인 한국테크놀로지그룹은 지난달 25일 서울 역삼동 사옥을 떠나 임차한 경기 성남시 판교 건물로 이사를 완료했다. 두산그룹의 주요 계열사도 올 연말께 판교 인근인 정자동에 27층 규모로 짓고 있는 분당두산센터로 둥지를 바꾼다. 현대중공업은 2022년 완공을 목표로 판교 일대 2만3866㎡ 부지에 19층짜리 연구개발(R&D)센터를 짓고 있다.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판교테크노밸리엔 1309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2018년 기준). 근무 인력은 6만3050명에 달한다. 이 중 30대가 절반가량인 47%로 가장 많고, 20대도 20%를 넘는다. 대부분의 건물이 포화상태였기 때문에 추가로 입주한 기업이나 늘어난 직원은 많지 않을 것으로 업계는 추정했다. 업종별로는 IT 기업이 863개로 전체의 66%를 차지해 가장 많았고, 게임회사와 바이오업체가 각각 13%와 12%로 뒤를 이었다. 이들 기업의 매출 합계는 87조5000억원에 달했다.

판교에 있는 방위산업업체 LIG넥스원의 정창균 인사지원실장은 “전체 직원의 절반 이상이 연구인력이어서 판교에 자리를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며 “판교로 온 뒤 이직률은 2% 정도에 그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후/김주완/정소람 기자 h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