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삼성전자가 약 8조원을 투자해 경기 평택 반도체 공장에 최첨단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건설하기로 했다. 지난달 21일엔 약 10조원을 들여 같은 공장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라인을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배포한 보도참고자료에서 대규모 투자에 배경에 대해 "위기일수록 더 투자한다는 반도체 성공 방정식을 다시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반도체 시황을 장담할 수 없지만 기회가 왔을 때 더욱 치고나가겠다는 뜻이다.
반도체 생산시설에 보름새 18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 결정을 내리는 건 최고경영자(CEO)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영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CEO들도 수십조, 수백조원이 들어가는 의사결정을 앞두고선 머뭇거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이 현재 한국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오너가 없었던 일본 반도체 기업 CEO들이 대규모 투자 결정을 선뜻 못내리면서 '투자 골든타임'을 놓쳤다.
삼성은 일본 기업과는 달랐다. 오너의 ‘빠른 결단’이 반도체 사업의 역사를 바꿨다. 다른 사람들이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지만 1983년 반도체산업에 전격 진출했던 고(故) 이병철 회장이 그랬다. 1987년 이후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투자와 관련한 숱한 결단들도 삼성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선대 회장들의 뜻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4월 "202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시스템반도체 세계 1위를 하겠다"며 '비전 2030'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18조원 투자 결정도 이재용 부회장의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란 얘기가 나온다.
최근 검찰의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창 청구 때문에 산업계에선 삼성 반도체 사업에 대한 걱정이 커지고 있다. 만에 하나 이 부회장이 재구속되는 '총수 부재' 상황이 다시 오면 삼성전자가 대규모 반도체 투자 계획을 차질없이 이행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최근의 삼성전자 발표는 말그대로 '계획'일 뿐이다. 파운드리 라인에 필요한 대당 2000억원에 달하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몇 대나 들여올 지, 최첨단 V낸드 기술 개발에 얼마를 쏟아부을 지 등 좀 더 세부적인 투자를 실행하려면 이 부회장의 판단과 결정이 필요하다.
일각에선 '당장 투자를 안 해도 삼성은 잘 돌아갈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없을 때 삼성전자 주가가 많이 올랐다', '유능한 CEO들이 회사를 잘 이끌 것이다'라며 총수의 부재에 대해 "우려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고 주장한다. 물론 올해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면서 영업이익이 늘고 주가가 오를 수도 있다. 각 사업부를 이끌고 있는 훌륭한 CEO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현재 사업을 잘 이끌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5~10년 뒤 미래라는 평가가 나온다. 기업의 투자는 대부분 중장기적인 관점을 바라보고 하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 D램,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 대만 TSMC를 추격하고 있는 것도 5년 전, 10년 전에 준비하고 투자했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들은 이건희 회장, 이재용 부회장이 없었으면 현재 위치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삼성전자의 경쟁자들은 '삼성의 위기'를 기회로 포착하고 있다. 삼성이 '차세대 반도체 사업'으로 꼽은 파운드리 분야애서 세계 1위(시장 점유율 1분기 기준 54.1%)를 달리고 있는 TSMC가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검찰의 이 부회장 구속영장을 청구한 4일 반도체 업계엔 TSMC가 후공정(패키징) 공장에 100억달러(약 12조원)를 투자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 달 전 120억달러(약 14조5000억원)를 들여 미국에 회로 선폭(반도체 회로 간 거리) 5나노미터(nm, 1nm는 10억분의 1m) 초미세 파운드리공장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꾸준히 투자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TSMC의 지속적인 투자엔 '대만 반도체의 대부'로 불리는 모리스 창 TSMC 창업주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마크 리우 TSMC 현 회장과 C.C.웨이 CEO가 전면에서 TSMC를 이끌고 있지만 이들 막후에서 실질적으로 회사를 이끄는 건 창 회장이기 때문이다. 창 회장은 꾸준히 삼성전자에 대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지난 1월 한 인터뷰에서 "삼성전자는 가장 두려운 경쟁자"라고 말했다. 2012년에도 "삼성전자가 가장 두려운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기업설명회에서 말했다. 국내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TSMC는 삼성의 위기를 기회로 격차를 벌리기 위한 투자를 꾸준하게 진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5.9%의 점유율을 갖고 있는 삼성전자가 TSMC를 따라잡는 일이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로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5위 파운드리 업체 중국 SMIC의 움직임도 최근 더욱 적극적이다. 미·중 반도체 갈등 영향이 있겠지만 SMIC는 TSMC와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해 투자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3일 외신들은 "SMIC가 상하이 증시 상장을 통해 200억위안(약 3조4000억원)을 조달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자금 대부분은 TSMC와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7nm 칩에 대한 R&D에 투자된다. SMIC는 중국 정부 기관들로부터 22억달러 규모 투자를 받았다.
SMIC의 기술 수준은 아직 TSMC와 삼성전자의 2~3년 전 수준이란 평가가 우세하다. 그래도 안심하긴 이르다. '반도체 굴기(堀起)'를 선언하고 산업을 육성하고 있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부가 뒤에서 SMIC를 떠받치고 있어서다. 앞으로도 중국 정부의 대규모 자금지원은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인적 파워도 만만치 않다. SMIC 기술 선진화를 이끄는 건 TSMC,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에서 일했던 대만 출신 양몽송 CEO다. 대만의 인력들도 SMIC에 스카웃돼 일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엔 화웨이 자회사 하이실리콘의 주문을 받아 14nm 공정에서 통신칩셋을 생산하는 데도 성공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는 말이 나온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가뜩이나 파운드리 1위 TSMC가 달아나고 후발주자 SMIC가 추격하는 '샌드위치' 상황이다.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고 이행할 총수의 리더십이 꼭 필요한 시점이란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다면 삼성 반도체 사업의 미래는 어떻게될까. "삼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산업계 관계자들의 말이 엄살로는 들리지 않는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