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우리말에도 이미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많은 외래어가 새로 유입됐고, 낯선 개념과 그에 따른 용어들도 어느새 우리 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됐다. 그중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우리말과 관련해 평소 간과해온 또는 잊혀가던 문제 몇 가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 말의 핵심어인 ‘거리’를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점에서 그렇다.
‘공간적 간격’과 ‘차 다니는 길’ 구별해야
코로나19가 어느 정도 잡혀가는 듯하던 지난 4월 1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가 열렸다. “4월 말부터 5월 초 황금연휴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동안 잘 지켜주신 사회적 거리두기의 고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정 총리는 이날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면서 ‘거리’의 발음을 [거:리]라고 장음으로 했다. 그는 요즘 수시로 입에 오르내리는 이 말을 정확하게 발음하는 몇 안 되는 이 중의 하나다. 방송 아나운서를 포함해 한국인의 대부분이 ‘거리’의 장·단음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우선 ‘거리’의 정체부터 알아보자. 한 시간 거리니, 거리가 머니 가까우니 하는 말을 흔히 쓴다. 또 “그 친구와는 왠지 거리가 느껴진다”고도 한다. 이때의 ‘거리’가 ‘사회적 거리두기’의 ‘거리’와 같은 말이다. 이는 공간적·심리적으로 떨어진 간격을 말한다. 이런 걸 누가 모를까? 그런데 이게 ‘비 내리는 명동 거리’라든지, ‘거리의 풍경’이라고 할 때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때의 ‘거리’는 다른 ‘거리’다. ‘사람이나 차가 다니는 길’, 즉 길거리를 뜻한다. 그러니 일단 ‘물리적 간격’으로서의 ‘거리’와 길거리의 ‘거리’를 구별해야 한다.
또 하나는 물리적 간격을 뜻하는 ‘거리’는 길게 발음하고, 차 다니는 길을 말할 때는 짧게 한다는 것도 큰 차이점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말에서 장음과 단음을 구별하지 않고 쓰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 어렸을 때는 [눈(目)]과 [눈:(雪)], [밤(夜)]과 [밤:(栗)]이 발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배웠는데, 요즘은 그조차도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러니 당연히 경기도 광주와 광주광역시의 ‘광주’를 발음으로 구별해 내지 못한다. 경기도 광주(廣州)는 [광:주]라고 길게 발음하고 광주(光州)광역시는 [광주]로 짧게 발음해야 한다. 廣이 ‘넓을 광’이니 길게 발음하고, 光은 ‘빛 광’이니 짧게 한다고 알아두면 외우기 쉽다.
경기도 광주는 장음, 호남의 광주는 단음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할 때의 ‘거리’는 순우리말일까 한자어일까? 아마도 십중팔구 고유어라고 답할 것 같다. 하지만 한자어다. ‘거리(距離)’는 ‘떨어질 거, 떠날 리’다. 그래서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간격을 나타낸다. 이에 비해 길거리의 ‘거리’는 순우리말이다. 관용구로 ‘거리에 나앉다’라고 하면 ‘집안이 망해 집이 남의 것이 돼 오갈 데가 없다’라는 뜻이다. 이때 쓰인 ‘거리’가 토박이말로 길거리를 나타낸다.
우리말 가운데는 한자 의식이 멀어짐에 따라 이처럼 한자어이면서 순우리말인 듯이 느껴지는 게 꽤 많다. 예를 들면, “할머니가 끓여 주신 죽이 맛있다”라고 할 때 ‘죽(粥)’이 한자어다. 그래서 ‘동짓죽’이 아니라 ‘동지죽’이다. ‘동짓죽’은 틀린 표기다. 한자어 ‘동지(冬至)’와 ‘죽(粥)’이 결합한 말이라 사이시옷을 넣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한자어와 토박이말이 어울린 ‘동짓날’과 비교된다. 비슷한 형태의 말인 것 같지만 사이시옷을 넣을지 안 넣을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