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상처 받고, 상처 주는 타인이라는 '미로'

입력 2020-06-04 18:15
수정 2020-06-05 02:10
‘그 몸을 안아 주지도/외면하지도 못하는 것/그런 게 마음이라면’

2014년 문학전문지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활발한 시작(詩作)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시인 양안다의 네 번째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에 수록된 시 ‘여름잠’의 한 대목이다. 시인은 《작은 미래의 책》,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에 이어 네 번째로 펴낸 시집에서 장시에 가까울 정도로 긴 시부터 짧고 강렬한 이미지를 투영한 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담아냈다. 전작들을 통해 꾸준히 고뇌해왔던 ‘타인’을 ‘숲’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숲의 미로를 탐색하는 과정’으로 형상화했다.

시집의 표제인 ‘숲의 소실점’은 과거 타인으로부터 얻은 추억의 체온을 끝까지 간직하려는 그리움의 장소와 타인과의 모든 관계에서 파국을 암시하는 새벽녘 같은 장소가 한 점으로 만나는 공간이다. 시인은 서시(序詩)인 ‘나의 작은 폐쇄병동’에 ‘회복자들’, 즉 자신의 마음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을 통해 평범한 사람처럼 목적을 갖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무작정 달리게 되는 공간인 새벽 거리를 보여준다. 이 회복자들을 비롯해 방공호에 숨어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데 급급한 어린아이들까지 시집 전반부를 장악한 미약한 화자들은 번갈아 세계의 반대편에 서 있는 타인을 향해 가자고 속삭인다.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다룰 줄 모르고 남에게 쉽게 상처받고 상처입히는, 어리고 미숙한 마음들을 시로 살펴낸다.

마지막시 ‘중력’에서 ‘숲의 소실점이 보인다’라는 문장은 ‘숲이 타오르고 있어’라는 문장으로 옮아간다. 계속해 헤매는 숲의 소실점을 보기 위해선 숲이 타야만 함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다. 이렇듯 전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읽는 이들의 감각이 그제서야 비로소 타자에게 활짝 열릴 수 있게 됨을 보여준다. 시인은 숲이 타는 과정 속에서도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거나 상처를 내 것처럼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은 채 그저 직시한다.

박동억 문학평론가는 “이 시집은 한 권의 체온”이라며 “타자의 죽음, 슬픔, 사랑, 마음을 직시한 뒤 머뭇거림과 침묵 끝에 이 모든 것에 패배했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아름다운 입술이 시집 전체에서 느껴진다”고 평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