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내 세탁기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
세탁편의점 프랜차이즈인 크린토피아 창업자 이범택 회장(사진)의 사업 비전이다. 그는 1992년 세탁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선 뒤 29년간 국내 세탁 문화를 바꿔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린토피아는 전국에 세탁 공장이 있는 134개 지사와 2945곳의 가맹점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 가맹점에서 고객 세탁물을 수거하면 각 지사에서 세탁해 다시 가맹점으로 배송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한다. 이 회사의 세탁 프랜차이즈 시장 점유율은 약 80%에 이르는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미개척 영역에 과감한 도전
크린토피아는 매년 사업 규모가 커지고 있다. 2017년 483억원이던 회사 매출은 지난해 827억원으로 늘어났다. “과거 일반 가정에서 처리하던 세탁물이 시대 변화에 따라 점포에서 처리하는 변화가 가속화하고 있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창업 초기에는 파격적인 가격 전략으로 주목받았다. 세탁 가맹점을 처음 모집한 1990년대는 일본에서 세탁 프랜차이즈 사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이 회장은 일본에서 정장 한 벌 세탁비가 600엔 정도인 것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한국의 정장 세탁비는 6000~7000원 정도로 별 차이가 없었다. 이 회장은 “일본과 한국의 국민소득 격차를 고려할 때 한국의 세탁비가 지나치게 비쌌다”고 말했다. 그의 머릿속에 “원가를 줄이고 고성능 자동화 기계를 쓴다면 소비자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동네 세탁소에서 한 장에 2500원 받던 와이셔츠 세탁비를 500원으로 낮췄다. 당시 신입사원 월급은 40만~50만원으로, 와이셔츠는 대부분 집에서 다림질하던 때였다. 집집마다 방문해 세탁물 수거와 배달을 해주던 세탁소 방식을 벗어나 점포에서만 손님을 맞았다. 원가를 낮추기 위한 전략이었다. 사업이 자리잡을 때까지 적자도 감수했다.
이후 국내 세탁업의 미개척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세탁산업의 ‘파이’를 키웠다. 1995년 이불세탁 서비스에 나섰다. 2000년 세탁업계 처음으로 운동화 세탁도 서비스 대상에 넣었다. 2009년에는 기존 세탁 편의점에 24시간 무인 영업이 되는 코인빨래방을 결합한 ‘세탁 멀티숍’을 시작했다. 현재 멀티숍은 766개로 늘었다.
이 회장은 “1인 가구, 싱글족 증가에 맞춰 기존 드라이클리닝 등을 맡길 수 있는 점포에 고객이 물빨래와 건조를 셀프로 할 수 있는 동전세탁방을 겸한 가게를 늘리고 있다”고 했다. 올 들어 부피가 큰 겨울옷, 커튼 등을 맡기면 이를 세탁한 뒤 몇 달간 보관해주는 ‘의류보관 서비스’도 시작했다. 가정 내 수납공간을 여유롭게 사용하려는 수요에 대응한 것이다. 경기 동탄의 보관시설에서 온도 및 습도를 조절해 안전하게 옷을 보관해준다.
“잘할 수 있는 사업을 하라”
크린토피아는 이 회장이 운영하던 염료업체 보고실업의 사업본부로 출범했다. 일종의 ‘신사업’ 개척이었던 셈이다.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뒤 (주)럭키(현 LG화학)에서 일했던 이 회장은 창업에 뜻을 품고 1981년 나일론 지퍼 제조사업에 도전했다. 이 회장은 “당시 나일론 지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의 쓴맛을 봤다”고 했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사업을 하자’고 결심한 배경이다.
이런 실패를 기반으로 1986년 보고실업을 창업했다. 보고실업은 청바지에서 물을 빼 ‘스노 진’을 만드는 청바지 워싱 사업을 했다. 이 회장은 경기 김포에 축사를 빌려 중고 워싱 기계를 들여놓고 청바지 물이 자연스럽게 빠진 것 같은 효과를 내는 기술을 홀로 연구했다. 관련 기술 개발에 성공했고, 보고실업에 주문이 밀려들었다. 당시 번 자금은 이후 세탁업 투자의 밑천이 됐다.
이 덕택에 크린토피아는 별다른 외부 투자 없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작년 말 기준 크린토피아는 이 회장 및 특수관계인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