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 이론의 창시자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은 1970년대 초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였던 한국에서 모르몬교 선교사로 2년을 지냈다. 당시의 경험으로 그는 한국에 초점을 맞춰 경제개발을 연구하겠다고 결심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크리스텐슨은 다시 ‘번영의 역설’ 문제에 맞닥뜨렸다. 한국은 1960년대 1인당 국내총생산(GDP) 155달러의 극빈국에서 2016년 2만7500달러의 부유한 나라로 ‘환골탈태’했다. 하지만 앙골라와 스리랑카 등 1960년대 한국과 비슷하게 가난했던 나라들 다수는 여전히 가난하게 살고 있다. “어째서 어떤 나라들은 번영의 길을 찾는데 다른 나라들은 가난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이 문제는 올 1월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크리스텐슨이 평생을 매달린 화두 중 하나였다. 그는 지난해 1월 한 인터뷰에서 “최근 들어 아프리카의 보건과 발전을 포함한 사회적 혁신에 ‘파괴적 혁신’ 이론을 적용하는 데 관심과 노력을 집중해왔다”고 밝혔다.
크리스텐슨이 에포사 오조모 크리스텐슨연구소 수석연구원, 캐런 딜론 반얀글로벌패밀리비즈니스어드바이저스 편집이사와 함께 쓴 《번영의 역설》은 이런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미국에서 지난해 출간돼 반향을 일으킨 이 책은 가난한 국가들이 번영의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공저자인 오조모가 직접 참여했던 ‘우물 설치하기’ 사업과 기업가 모 이브라힘이 세운 아프리카 최대 통신사 셀텔의 사례를 비교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오조모는 ‘가난은 이제 그만’이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어렵사리 자금을 모아 고국 에티오피아에 우물 5개를 설치했다. 하지만 몇 달 뒤 우물들은 고장나 방치되기 시작했고 결국 이 일을 포기했다. 실제로 아프리카엔 이렇게 원조를 받아 만들어졌지만 고장나 버려진 우물만 5만 개가 넘는다. 저자들은 “눈에 보이는 가난의 징표들을 바로잡는 데 투자하는 방식으로 직접 지원하는 해결책은 가난을 누그러뜨릴 순 있어도 눈에 띄게 바꿔놓지는 못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저소득 국가들의 열악한 인프라 개선부터 각종 제도 정비, 해외 원조 증대, 대외 무역 활성화 등 다양한 방법이 시도됐지만 결과는 ‘우물 설치하기’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자원들을 피폐한 지역으로 투입하기만 하면 가난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과 “개발에 기반한 전통적인 해결책 같은 ‘밀어붙이기 전략’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아프리카 통신사 셀텔은 ‘비소비’ 상태, 즉 잠재적 소비자가 자기 삶의 특정 측면에서 어떤 발전을 필사적으로 원하지만 해당 문제에 대한 간편하고 저렴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990년대만 해도 아프리카에서 휴대폰은 부자들만 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층이 다수인 아프리카에서 휴대폰은 뿌리내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브라힘은 교통시설이 빈약한 아프리카에서 사람 간 통신 문제야말로 꼭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이자 잠재력이 큰 시장이라고 봤다. 그는 이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기회를 엿본 끝에 1998년 셀텔을 설립했고 2005년 34억달러의 가치를 평가받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셀텔 덕에 아프리카엔 9억6500만 개가 넘는 휴대폰 회선이 제공되는 거대 통신시장이 만들어졌다. 저자들은 “지속적인 번영은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는 혁신에 투자함으로써만 가능하다”며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변모 과정에서 삼성, 현대, LG, 기아, 포스코 같은 기업들의 ‘시장 창조 혁신’이 결정적 변수로 작용했다”고 강조한다.
“가난한 나라들이 번영을 누리는 길은 결국 ‘발상의 전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셀텔 사례처럼 단순히 가난만 보지 말고 기회와 잠재력을 먼저 보자는 관점이다. 이들은 “전기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6억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거대한 가난의 표시 대신 개발과 발전을 기다리는 기회이자 거대한 시장 창조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망 없어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는 새로운 시장이나 번성하는 시장을 창조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비소비 상태에서의 과제를 이해하고 잠재력 있는 시장으로 바라보는 관점, 실패를 거듭해온 ‘밀어붙이기 개발 전략’ 대신 시장 기반의 ‘끌어당기기 전략’을 추구하는 관점이 지속가능한 번영을 촉발한다”고 주장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