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연 탈선이 부른 '기부 포비아'

입력 2020-05-26 17:38
수정 2020-10-09 16:03

“후원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알 수 없어 기부금 자동이체를 중단시켰다.”(회사원 A씨) “시민단체를 통한 기부는 대폭 줄이고 기부처를 직접 찾으려고 한다.”(대기업 사회공헌담당 임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인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윤미향 전 대표 등을 둘러싸고 연일 ‘수상한 기부금’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기부문화 전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개인들의 기부의욕은 크게 꺾였다. 주요 시민단체는 “내 기부금은 제대로 쓰이고 있느냐” “여기도 문제가 있다면 기부를 중단하겠다”고 따져 묻는 전화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정기적으로 해오던 기부를 끊겠다는 연락을 받은 곳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니세프 관계자는 “정의연 사태로 기부 자체에 대한 반감이 커진 것 같아 우려가 크다”며 “정작 지원받아야 할 소외계층이 간접적인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주거복지시설 ‘나눔의집’에 2년간 기부하던 40대 여성 B씨는 “공익적 목적을 믿고 기부했다가 최근 보도를 보고 실망해 기부를 중단했다”고 말했다.

주요 기업의 사회공헌조직도 정의연 사태로 크게 위축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2008년 이후 매년 2조원이 넘는 기부를 해왔다. 한 대기업 사회공헌팀 직원은 “직원들이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기부를 해왔느냐’고 따가운 눈총을 보내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기부문화가 얼어붙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매년 90억원 넘게 기부하는 C금융사 관계자는 “회계가 불투명한 시민단체는 제외할 수밖에 없다”며 “지방자치단체 추천을 받아 아동복지센터 등 특정 기부처에 직접 지원하는 형태로 기부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고 말했다.<hr style="margin: 25px 0px; border: 1px solid rgb(195, 195, 195); border-image: none; display: block !important;" />개인은 복지단체 등에 기부 끊고…기업은 '기부 방식' 변경 고민

“이제 기부하는 모든 단체를 못 믿겠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찾아 직접 도움을 주는 게 낫겠습니다.”

루게릭병 환자를 돕는 비영리재단 승일희망재단에 기부를 끊겠다며 걸려온 전화의 내용이다. 승일희망재단은 재정 내역을 1원 단위까지 공개하는 투명한 시민단체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요즘 승일희망재단에는 기부를 중단하겠다는 전화가 오고 있다. 승일희망재단 관계자는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모든 기부단체에 대한 불신과 실망으로 이어질 정도로 파장이 크다”며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모금한 돈을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전 정의연 이사장) 등이 유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기부 중단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기업들은 기부 방식을 손질하거나 기부 대상 관리를 강화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年10조원 이르던 기부금 어쩌나

2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기부금은 2010년 처음으로 10조원을 넘겼다. 국세청에 신고된 개인과 법인의 기부금 규모는 2010년 10조340억원을 시작으로 매년 꾸준히 늘어 2017년엔 12조9537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정의연 사태 이후 증가 추세가 주춤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민단체의 기부금 사용을 둘러싼 논란은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 2010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에서 기부금 사용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됐다. 이때마다 다른 시민단체는 후원금이 줄어드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김운호 경희대 시민사회NGO학과 교수는 “시민단체 스스로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기부단체에 대한 관리 체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승일희망재단 관계자는 “몇몇 문제를 일으키는 단체 때문에 묵묵히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는 단체들까지 외면당해선 안 된다”며 “정부나 기업이 하지 못하는 일을 시민단체가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했다.

기부 방식 바꾸려는 기업

일부 기업은 기부금 사용 내역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시민단체에는 기부하지 않겠다는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에 대한 기부를 줄이거나 검증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확산될 거란 전망도 나온다. 주요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은 “시민단체 등 공익법인의 기부금 관리 체계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은 게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정부가 기부를 독려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고, 정작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관리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했다.

연 900억원을 기부하는 A은행의 사회공헌 담당자는 “시민단체에 기부 실사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모든 기부금의 사용 내역을 따져볼 수 없기 때문에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 은행은 기부처 선정 과정을 더욱 까다롭게 바꾸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 B카드사 사회공헌 담당자는 “기부처를 선정할 때마다 참고할 만한 객관적 지표를 찾기 어렵다”며 “기부금을 제대로 사용하는지 등에 대한 빅데이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재부·국세청, 관리감독 따로따로

공익법인의 ‘엉터리 회계 처리’를 관행처럼 둬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낸 ‘2019년 비영리 민간단체 공익활동 지원사업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행안부 보조금을 받은 220곳의 회계평가 평균 점수는 85.40점으로 3년 전인 2016년(89.77점)보다 4.37점 낮아졌다.

공익법인 공시 업무를 수행하는 주체는 국세청이다. 자산총액 5억원 이상이거나 연간 수입금액이 3억원 이상인 공익법인은 회계 결산 서류를 국세청에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제출 서류의 종류와 양식 등은 국세청 상위 기관인 기획재정부가 정한다. 공익법인 공시 업무가 기재부와 국세청으로 나뉜 구조다. 국세청 관계자는 “국세청은 공익법인 공시 업무를 법에 따라 수행하는 기관일 뿐”이라며 “제출 서류의 양식과 기준 등은 기재부가 법률 제정이나 시행령을 통해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세청에 양식 변경을 요청해도 기재부 소관이라고 미루기만 한다”며 “양쪽 모두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했다.

정지은/양길성/최다은/김남영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