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사이에서 외줄 타는 기분입니다.”
최근 만난 국내 한 반도체업체 고위관계자는 “중국 화웨이를 둘러싼 미·중 간 공방이 격화될수록 한국 반도체 업체에 대한 양국의 압박과 회유도 심해질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공격하는 미국, 방어하는 중국 양쪽 모두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상대방을 주저앉힐 무기’가 될 수 있다. 두 회사가 D램 시장의 73%(2019년 점유율 기준)를 장악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키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D램 공급을 끊게 되면 화웨이는 재기 불능 상태에 몰린다.
문제는 한국 업체가 ‘칼자루’가 아니라 ‘칼끝’을 붙잡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과 중국이 매출 비중 1, 2위를 다투고 있어 어느 한쪽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미국 “화웨이는 中 스파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 국방부는 “화웨이가 중국 인민해방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며 ‘민간기업의 탈을 쓴 스파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는 더욱 강경해졌다. 미국 고위관료들은 “화웨이가 스마트폰과 네트워크장비를 통해 군사 기밀을 훔쳐간다”며 “미국 기술을 불법으로 가져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작년 5월엔 화웨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국 내 판매’를 금지시켰다.
강력한 제재에도 지난 1년간 화웨이가 스마트폰, 네트워크장비 등을 꾸준히 생산하자 미국 상무부는 이달 14일 ‘대(對)화웨이 추가 제재안’을 내놨다. 화웨이가 자체 개발한 통신용 반도체를 조달할 수 없도록 화웨이의 설계도를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대만의 파운드리(수탁생산) 업체인 TSMC에 미국 정부의 수출 허가를 받게 한 것이다.
삼성·하이닉스 없으면 제품 못 만들어
최근 강화된 제재도 화웨이를 주저앉히지는 못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통신용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는 대신 미국을 제외한 국가의 기업이 개발·생산한 반도체를 조달하는 것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에선 미국 정부가 더 강력한 제재 카드를 꺼낸다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활용할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은 미국이 ‘화웨이의 스파이 행위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하며 ‘메모리 반도체 공급 중단’을 요청할 경우다. 두 업체 모두 쉽게 거부할 수 없는 압력에 직면하게 되는 셈이다. 화웨이 스마트폰과 네트워크장비 등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제조한 반도체는 지금도 들어가고 있다. 미국 정부는 ‘화웨이가 스마트폰과 네트워크장비를 통해 기밀을 훔친다’는 의심을 걷어내지 않고 있다.
미국으로선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키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화웨이를 끝낼 ‘마지막 결정타’로 활용할 수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는 ‘산업의 쌀’로 불릴 정도로 광범위하게 활용된다. 화웨이 스마트폰과 네트워크장비는 물론 애플, 인텔 등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정보기술(IT)기업 제품에 들어간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특정 업체에 D램 공급을 끊으면 그 업체는 IT 제품 제조를 사실상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화웨이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중국 법인 고위관계자들에게 ‘안정적인 납품’을 요청한 것도 반도체 공급을 두 회사가 장악하고 있어서다. 국내 반도체업계에선 화웨이가 장기전에 대비해 반도체 재고를 더 쌓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계산 복잡해진 반도체 투톱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하며 피해 최소화 방안을 찾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상대적으로 고민할 게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화웨이와의 관계가 반도체 ‘제조사-고객사’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화웨이에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는 동시에 세계 스마트폰과 네트워크장비 시장에서 경쟁하는 삼성전자는 더 복잡한 ‘수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화웨이는 삼성전자로부터 연 4조원 안팎의 메모리 반도체를 구매하는 큰손인 동시에 글로벌 스마트폰 2위 업체로서 1위 삼성전자를 뒤쫓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힘을 주고 있는 5세대(5G) 네트워크장비 시장에선 글로벌 1위 업체다. 반도체업계에선 삼성전자가 미국과 중국 어느 한편에 치우치기보단 중립을 지키며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